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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낙태죄는 여성 보호에서 시작됐다?


입력 2019.08.03 07:30 수정 2019.08.03 06:48        이석원 객원기자

<알쓸신잡-스웨덴 60>19C ‘남성들의 낙태 강요’ 금지가 법 취지

18주 이전 누구나 낙태 가능하나 철저한 감독과 관리가 필수 요소

<알쓸신잡-스웨덴 60>19C ‘남성들의 낙태 강요’ 금지가 법 취지
18주 이전 누구나 낙태 가능하나 철저한 감독과 관리가 필수 요소


스웨덴은 원칙적으로 낙태가 허용된 나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낙태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정부의 철저한 관리와 감시가 수반된다. (사진 = 이석원) 스웨덴은 원칙적으로 낙태가 허용된 나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낙태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정부의 철저한 관리와 감시가 수반된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에 있는 종합병원 카롤린스카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의 30대 여성 니키 아마도르는 스웨덴 영주권자다. 스웨덴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던 그는 남자친구와 이별을 한 후 고국인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년 후 그는 다시 스웨덴에 돌아왔다.

당시 니키는 임신 15주 째였다.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 아빠는 니키가 임신한 것을 알고는 미국으로 떠나 소식을 끊었다.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니키는 다시 스웨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니키는 카롤린스카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니키가 굳이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필리핀이 법으로 낙태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떤 경우의 낙태로 법으로 금지한다. 니키는 필리핀에서 아기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스웨덴은?

‘스웨덴은 낙태가 법으로 보장된 나라다’거나 ‘스웨덴에서는 낙태가 전면 허용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낙태에 대한 포용성이 가장 강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태가 법으로 무한정 허용되지는 않는다.

스웨덴에서 낙태가 법으로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1864년이다. 그런데 당시 낙태를 금지한 것은 여성들의 낙태 의지를 규제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낙태 강요를 금지한 것이다.

봉건 가부장 사회였던 스웨덴에서는 딸을 임신한 여성들에게 낙태가 강요되기 일쑤였다. 무속과 종교적 신비주의에 의해 태아가 여자 아이라는 판정을 받은 가정에서 남편이나 가문에 의한 낙태가 강요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낙태는 태아 뿐 아니라 산모까지 죽였다. 그러다보니 임신 자체가 공포가 된 것이다. 당시 국왕 칼 15세는 이런 풍속을 다스리기 위해 낙태금지법을 제정했고, 낙태를 할 경우 산모 뿐 아니라 남편이 강한 처벌을 받았다.

여성이 직장 생황을 하기 시작한 20세기에 들어서서 낙태금지법은 점차 낙태 당사자인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고, 여성을 사회적으로 속박하는 무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여성의 인권에 대한 논의들이 이뤄졌고, 낙태 또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범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신한 여성에 대한 기업의 차별이 낙태금지법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으로 발전된 셈이다.

1932년 이후 낙태금지법 폐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 시작됐다. 그리고 1938년 처음으로 낙태금지법이 완화됐다. 임신 때문에 심각한 건강의 문제가 생긴 여성의 경우 일부 낙태가 허용된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여성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자기결정권 논의가 촉발됐고, 이 문제는 스웨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1965년 낙태금지법 개정위원회가 정부에 설치됐다.

마침내 스웨덴 의회는 1971년 새로운 낙태법을 만들었고, 이 법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스웨덴에서 가장 큰 병원인 카롤린스카. (사진 = 이석원) 스웨덴에서 가장 큰 병원인 카롤린스카. (사진 = 이석원)

스웨덴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다. 임신 18주까지는 이유 불문하고 낙태가 허용된다. 18주가 지난 후 22주까지는 사회복지청(Socialstyrelsen)에서 낙태 여부를 허가 받아야 한다.

미성년자도 성인인 보호자의 동의를 받으면 낙태가 허용된다. 그런데 그 성인인 보호자는 꼭 부모가 아니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임신 22주가 경과한 산모에게는 낙태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낙태의 가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청이 낙태를 허용한 경우에도 낙태 시술이 이뤄진 후 국가 서비스에 의해 전문적인 상담이 이뤄진다.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해주고, 낙태는 최후의 선택이라는 인식을 갖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스웨덴 시민이 아니어도 낙태가 가능하다. 그래서 2018년 5월 25일에야 낙태금지법이 폐지된 아일랜드나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독일에서는 스웨덴으로 원정 낙태를 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웨덴에서 낙태가 만연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병원에서 출산을 할 때는 거의 비용을 치르지 않지만 낙태를 하게 되면 500~700 크로나(약 6만원~8만 5000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한다. 스웨덴의 주민등록번호격인 개인 번호(Personnummer)가 없는 경우에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고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최근 한국도 낙태죄가 폐지됐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가 상당수 시민들의 동의를 받고 있으면서도 한국 사회가 낙태죄를 계속 유지됐던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 존중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가 ‘대립’이라는 비정상적 가치관에 얽매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의 사회도 이 문제로 오랫동안 갈등해왔다. 특히 전통적인 가톨릭의 교리가 깊게 배어있기 때문에 더 그래왔다. 하지만 잘 극복하고, ‘양립 불가능’한 고귀한 가치들을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의 영역으로 잘 안착시켰다.

낙태를 금지하는 것이 여성을 낙태 강요로부터 보호하려고 시작했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시각에서는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스웨덴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었나 보다.

글/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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