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 시기 출산·양육 '투자재'…오늘날은 소비재 넘어 '사치재'
서울시, 난임 시술별 횟수 제한 폐지…시술 부작용·후유증 정보 빠져
출산연령 앞당겨 난임 비율 줄이는 근본 방안 없어…반쪽짜리 대책
고용·주거·교육·보육 소비재적 특성 해소돼야 출산율 높일 수 있어
한국 경제 고도성장 시기 출산과 양육은 일종의 '투자재'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개천 용이 나오던 시절에는 출산에 따른 이익이 가정으로 돌아왔다. 야간 상고를 나온 가난한 학생이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입사해 30대 거대 건설회사 사장을 하다 대통령까지 된 이명박 신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출산과 양육은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소비재'가 됐다. 부모가 자녀 1명을 낳고 26세까지 양육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6억1583만원으로 추정된다. 아이 한 명을 낳는데 치러야 할 대가가 커져 가계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청년들은 출산을 하려면 거대한 결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최근 아이를 낳고 싶은 난임부부에게 '소비재'를 넘어 '사치재'가 돼 버린 출산 부담 비용의 상당 부분을 덜어주는 오세훈 서울시장표 첫 저출산 대책이 나왔다. 난임부부들은 시험관 시술을 받을 때마다 최대 200만원의 비용이 든다. 시술 과정이 길어질수록 비용 부담은 더 커진다. 이에 시는 소득과 상관없이 모든 난임부부에게 회당 최대 110만원의 시술비를 지원하고 시술별 횟수 제한도 없애기로 했다. 난자 냉동 시술을 원하는 30~40세 여성에게는 최대 200만원까지 제공하는 시범사업도 전국 최초로 시작한다.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앞으로 출산을 희망하는 여성들의 가임력 보존을 고려한 조치다.
하지만 이 같은 서울시 대책은 반쪽짜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면서 정작 출산연령을 앞당겨 난임 비율을 줄이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출산이 소비재에서 사치재가 되는 사회적 현상은 내버려 둔 채 세금만 쏟아붓는 꼴이다. 애초 난임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는 데는 점점 결혼 연령이 늦어지는 만혼(晩婚)의 영향도 있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면서 출산 시기를 미루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서울 열린데이터 광장에 따르면 2021년 서울 엄마의 평균 첫째 아이 출산연령은 이미 34.21세다. 대한가임력보존학회에 따르면 여성의 가임력은 보통 30세가 넘어가면서 떨어지고 35세가 되면 급격히 감소한다.
서울시 대책이 출산 증가에 효과가 일부 있더라도 난임 시술을 받는 여성의 건강권이 간과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난임 시술 과정에서 과배란제를 유도하는 초고농도 호르몬 주사를 여성의 몸에 투여하는데 부작용과 후유증 데이터는 쏙 빠졌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난임 시술별 횟수 제한을 없애고 지원한다는데 고통을 겪는 여성들이 어느 시점에 난임 시술을 그만두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지에 대한 안내도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난임부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에 앞서 난임 시술이 여성의 건강권을 얼마나 침해하는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으로 여성의 가임을 앞당기기 위한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한국은 평생 먹고사는 걸 책임져 주지 않는 대학교 졸업장이 필수재가 되고, 평생 같이 살 가족을 꾸리는 집과 출산이 사치재가 돼 버렸다. 부모의 도움 없이 중위가격 10억원에 달하는 서울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할 수 있는 젊은이는 거의 없다. 생산인구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고 소비하는 비용도 많은데 주거마저 불안정하다 보니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은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 또는 지자체가 아이 한 명을 낳는데 치러야 할 대가를 줄여줘야 한다. 고용·주거·교육·보육 등 각 분야에서 소비재적 특성이 해소돼야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
오 시장은 지난해 합계출산율 0.78명을 기록했다는 통계가 나오자 "모든 걸 다 바꾸겠다는 각오로 저출생 해결에 가능한 자원을 최우선적으로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0.7명대 출산율은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한 건 물론이고 현대사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수치다. 사회주의 붕괴라는 거대한 체제 변화를 겪은 1994년 동독 지역의 합계출산율이 0.77명이었다.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9명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서울시가 16년간 저출산 대응 예산 280조원을 쏟아붓고도 출생아 수가 반토막이 난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소비재가 된 출산과 육아의 재화적 특성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