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이렇게 말 잘하는 감독은 처음이다. 형식적으로 말의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게 아니고 내용이 옹골차다. 세상의 모든 작품,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분석 틀’을 제시하는데 유효하다. 가히 배우 송강호가 반할 만하다. 감독 신연식이다.
짧지 않은 세월 적지 않은 영화인을 인터뷰했다.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배급자는 배급자대로, 감독대로 배우대로 스태프대로 쌓아온 필모그래피와 다져온 인생 경험과 사유해온 철학에 따라 저마다의 좋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그 진솔함에 반하고, 때로는 그 방대함이나 깊이에 반하고, 때로는 신선함에 반한다.
2024년 드라마 ‘삼식이 삼촌’에 이어 영화 ‘1승’까지 연이어 두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인 감독 신연식의 화법은 이 모든 걸 갖췄다.
무엇을 물어도 머리 굴리지 않고 즉답을 내놓을 만큼 콘텐츠가 단단하다. 잘한 것 못한 것 굳이 가리고 감추거나 잘난 것 못난 것 애써 포장할 필요 없다는 듯 솔직하다. 뻔한 질문을 해도 대답은 그가 연출한 영화 ‘러시안소설’이나 ‘조류인간’ ‘프랑스 영화처럼’, 그가 각본을 쓴 ‘동주’나 ‘거미집’처럼 독특하게 재미있어서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이만큼의 미덕과 재미, 개성을 품고 있는 영화인은 그만이 아니다. 신연식 감독의 특장점은 자신이 오랜 세월 경험과 사유를 통해 구축해온 사람과 인생에 관한 ‘핵심 개념’과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에 관한 터득이 있고, 그것을 작품의 인물을 세우고 그 인물들이 어우러져 이야기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지점은 신연식의 핵심 개념과 세상 작동원리를 나의 인생과 세계로, 다른 이의 작품 속으로 가져와도 해석력과 분석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세상,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사고 틀(scheme)은 아니지만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하고 깊숙이 추출해내는 유용성이 대단하다.
무슨 얘기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추상적으로 적은 기자의 글 탓이다. 감독 신연식의 말속에서, 영화 ‘1승’과 드라마 ‘삼식이 삼촌’ 안에서 만나면 한결 쉽고도 명확하다. 차근차근 풀어볼까.
# 신연식의 솔직함
“드라마 ‘삼식이 삼촌’ 촬영 중에 이 빠진 얘기가 그리 재미있나요? 송 선배님께서 말씀하셔서, 아마 그 정도로 모든 걸 걸고 열심히 했다를 말씀해 주시려 한 것 같은데, 여러 기자께서 물어보시네요. 이인 줄도 몰랐어요, 카메라 돌아가고 현장 모니터 앞에서 디렉팅하고 있었는데, 뭐가 투드득 떨어지는 거예요. 뭐지? 허연 걸 집어보니 이빨인 거예요, 앞니 안쪽니 두루두루 4개. 어찌 보면 당연하죠. 300만 원, 1억 들고 영화 찍던 제가 400억 원, 그것도 남의 돈으로 대작을 찍는데 진심 피와 살을 다 갈아 넣은 거죠. 촬영하면서 대본도 써야 했어요, 잠잘 틈이 없고 쉴 틈이 없었어요.”
16부작 드라마 ‘삼식이 삼촌’, 영화와는 사뭇 다른 드라마 작업을 거친 후 이어진 ‘1승’ 편집. 신연식 감독은 “영화라는 게 원래 촬영본을 줄이고 줄이는 작업이기도 하고 16부작에 달하는 ‘삼식이 삼촌’을 겪고 나니 압축, 줄이고 싶은 욕구가 솟아 ‘1승’에서 필요 이상으로 편집한 장면도 있다”고 말했다. 어떤 장면인지 물었다.
“편집하다가 제가 울컥해서 뺀 장면이에요. 김우진 감독(실업 배구 시즌 전패의 꼴찌팀 ‘핑크 스톰’에 영입된 감독, 고교 때 잘나가는 선수였으나 거기서 멈춘 불운의 인물, 송강호 분)이 말하는 거예요. 남들은 10승, 100승 잘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1승이 어렵냐. 순간 제 얘기더라고요. 23년을 영화에 매진해 왔는데 만날 실패만 하고 빚만 지고 제대로 이겨본 적, 1승을 거둔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울컥한 거죠(웃음).”
개봉을 앞둔 소감에 대한 답변에도 감독 신연식은 김우진 감독을 소환했다.
“늘 그렇죠, 뭐. 작품 나오면 비슷비슷한 기분, 약간 김우진 감독이랑 비슷해요. 김 감독이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심정, 시사회 전 주까지 편집하고 마지막 믹싱까지 보며 ‘내가 김우진이다, 어떻게든 한 번 이겨보려고 오만 짓을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개봉도 그런 거잖아요, 일종의 공약(배우 박정민이 연기한 ‘핑크 스톰’ 구단주 강정원은 팀이 시즌 내 1승을 거두면 시즌권 구매자 100명에게 2000만 원을 쏘겠다는 20억 공약을 걸고 시즌권 완판을 이뤄낸다)이고. 일을 벌여놨고 마지막 승부인데 이길지 질지 알 수 없고, 관객은 늘 부동의 1위 최강 ‘블랙 퀸즈’ 같고, 나보다 약한 팀은 없어 보이고, ‘위키드’(개봉 중인 미국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마법사 이름)가 마술 부릴까 겁나고요.”
# 신연식의 거시적 혜안
영화 잘 만들기만 하면, 재미있기만 하면 흥행하는 시대가 아니다. 외적 환경의 상황 변수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고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서는 녹록한 세월이 아니다. 오랜 시간 가성비 높은 대중문화 향유 기회였고, 가족 나들이와 특별 이벤트의 주요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제 월정료 내고 다양한 형식의 영상물을 즐기는 OTT(Over The Top, 인터넷TV)로 패권이 이동했고, 비싸더라도 뮤지컬이나 콘서트, 순수예술공연과 같이 눈앞에서 직접 아티스트를 보는 경험을 특별 이벤트로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영화로서는 시대 변화에 따른 대책, 그에 앞서 현 상황에 대한 메타적(meta-, 보다 위에서 한눈에 전체를 파악하는 초월적) 진단이 필요한 시기다.
“코로나19 이후 더 그런 것 같아요. 영화 ‘동주’ 때도 얘기했는데, 진정한 20세기는 1920년부터다, 전 세기의 기득권이 사라진 이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 같은 맥락에서 진정한 21세기는 20세기 기득권의 힘이 빠진 코로나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후일 역사 시간에, 100년 후에 ‘진정한 21세기는 코로나 이후 시작됐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기자들도 체감하실 거예요, 코로나 이전에 개봉했으면 이렇게까지 흥행에 실패할 영화가 아닌데 80만~90만 할 영화가 지금은 20만이 들어요. 단순히 ‘극장 산업이 바뀌었다’로 얘기할 게 아니라 ‘21세기로 들어섰다’는 거죠.”
“진정한 새 세기에 들어섰다는 건 우리가 변해 있다는 겁니다. 나부터 변했다, 앞에 계신 기자들도 변했다. 저만해도 유튜브 숏츠도 끝까지 안 봐요. 그렇다면 2시간 길이의 영상, 영화는 어떻게 변해야 하나의 화두에 직면하죠. 우선 화법은 바뀌어야 한다. 그래도 헷갈리지 않아야 할 것은 주제 의식이 바뀌는 건 아니다. 21세기가 됐다고 우리가 국봉(애국적 자부심)이나 신파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좋아해요. 다만 화법이 바뀌어야 한다. 서사 장르로 설명하면, 21세기라고 강자가 약자 두드려 패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나 말하는 방식, 디테일한 시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스포츠영화에서 약팀이 강팀 이기는 서사, 그리스로마시대 이후 사랑해온 서사의 기본 매카니즘이 변해야 한다는 게 아니고 어떤 식으로 보고, 말할 것인가에 대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 신연식이 말하는 세상과 드라마가 작동하는 원리
이 얘기는 ‘삼식이 삼촌’에서 시작해 보자.
“역사적 흐름은 단순하지 않아요. 천성과 관성에 영향을 받아요. 어떤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기보다 미시적 작동원리, 그것이 거시 역사에 끼치는 영향, 다시 거시가 미시에 끼치는 영향, 원인을 찾아보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이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내 인생이, 사람의 삶이, 세상이 이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아닐 수 있겠구나! 부조리를 인식하는 순간이 ‘삼식이 삼촌’ 엔딩에 나옵니다. 제 작품 엔딩은 어쩌면 다 (부조리 인식의 순간으로) 똑같아요.”
“삼식이(송강호 분)가 말했던 대로 김산(변요한 분)이 후일 장관이 되어 경제 5개년 추진하고 있고, 그때 산이가 생각하는 거죠. 이게 내가 생각했던 그건가, 내가 꿈꿨던 그건가? 부조리 인식의 순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긴 얘기를 쓴 거죠. 가장 최근의 현대, 대한민국 사람과 역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 변수가 드러나는 가장 가까운 시기를 택한 것뿐이지 ‘삼식이 삼촌’은 몇몇 분들이 얘기하시는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했다면…의 가정을 풀어본 대체 역사물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의 정체성,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데 결정적 시기로 3가지를 꼽는데요. 삼국통일, 계유정난, 4·19입니다. 역사가 한 사람, 한 번의 쿠데타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삼식이 삼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천성과 관성대로 움직이고 그렇게 각자 다른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흐름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그게 역사이고요. 이런 인물 각자의 행동을 결정짓는 천성과 관성, 서로 간의 영향과 갈등 속에서 행해지는 선택의 행간과 흐름에 관심을 두시면 조금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신연식의 천성과 관성…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
거시와 미시의 요동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역사와 드라마의 흐름, 그것의 바탕이 되는 천성과 관성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볼까. ‘삼식이 삼촌’에서 ‘1승’으로 옮아가는 얘기다.
“삼식이 삼촌은 전쟁 중에도 내 아는 이들의 세 끼를 먹인 사람, 그러나 실체는 세 끼만 주면 뭐든 하는 박두칠이어서 삼식이인 거죠. 천성은 못 바꾸고, 천성에 따라 관성을 대하는 게 다른데요. 삼식이는 천성으로 관성을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그 관성이 다시 천성화돼서 신념화된 사람이고요. 무슨 얘기냐면 아무도 없는 데서 빵을 혼자 먹어요, 어렸을 때 어려워서 못 먹었던 빵. 이 사람에게는 끼니가 천성으로 중요하고 성공의 증표가 양껏 맘껏 빵을 먹는 거예요, 관성이 된 거죠. 세 끼를 채울 밥벌이는 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가치, 신념이 된 거고요.”
“천성 그대로가 관성이 되고, 그 관성이 천성화되어 신념화된 게 삼식이라면. 나는 의미 있는 사람이야, 임원이 될 거야, 이런 분들은 관성이 곧바로 신념화된 경우죠. (이런 사람이 기자가 된다면) 누가 나보다 기사 많이 썼나, 누가 영화를 제대로 봤나 계속 살피는 관성이 일상을 지배하는 거죠. 김산이 그런 사람인데요. 김산의 딜레마는 욕망이 있고, 욕망에 대비되는 순수함도 있다는 거예요. 민주당에서 오라면 가고, 쿠데타 하자고 하면 할 만한 판인가 살피고, 이러는 게 아니라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주창하지만 실은 또 흔들려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 싶거든요.”
“김우진의 고교 선수 시절 은사이자 그를 버린 감독, 현재 대한민국 1위 전승을 달리는 ‘블랙 퀸즈’ 감독 문오성(김홍파 분)은 빌런이 아니에요. 이기는 편에 선 인물이에요. 우승하고 싶어 우승팀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내 팀으로 우승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천성이죠. 르브론 제임스(마이클 조던에 견줘질 만큼의 최고 선수로 소속 구단이 현재까지 4곳)도 있고, 스테판 커리(2009년 이래 줄곧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소속되어 4번의 팀 승리를 이끈 선수)가 있듯이요. 그게 쭉 이어지면 관성이겠죠.”
“김우진은 자기가 하던 걸로 인정받고 싶고 그래서 어린이 배구 교실을 망해 먹으면서도 농구를 계속해요. 자신이 선수 시절 잘하던 바로 그 플레이로 문오성 감독을 이기고 싶어요, 복수라기보다 자신을 입증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이 인정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관으로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근데 욕구가 있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저만 해도 왜 300만 원으로 3시간짜리 영화 만들고, 1억 갖고 사람이 새가 되는 거 만들고(‘조류인간’). 나도 망할 줄 알면서 왜 이걸 할까. 저의 천성인데, 내 천성으로 증명하고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 게 아닐까, 내 천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천성이 천벌이 되지 않을까, 천성에 대한 의심이 오는 순간이 있어요. 이때 끝내 이겨내려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부정을 하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어요. 이러다 만날 300만 원으로 영화하고, 빚지고, 빚쟁이에 쫓기다 죽는 거 아닐까.”
“다시 우진으로 돌아와서, 우진이 정말 대학팀에 갈까, 진짜 가려는 걸까요? 부총장이 좋아한다는 낚시, 그걸 위해 낚싯대 신나게 닦는데 진심일까. 제게 누가 ‘연출료 3억 줄게, 조폭코미디 해’라고 하면 할까. 내가 왜 1억 갖고 이렇게 힘들게 (영화)하지? 김우진의 천성에 들어가 보면, 대학팀 가지 않고 1승 못 거두면 은퇴할 것 같아요, 힘든 길을 가는 건데요. 왜 그럴까요. 김우진의 마지막 고백이 있죠. ‘이대로 영원히 지기만 할 수도 있겠죠, 내 인생 끝날 때까지 질 확률이 높아요. 근데 이기고 싶어요!’, 그게 이 사람의 천성인 거예요.”
# 한 번을 이기기 쉽지 않은 우리, 영화 ‘1승’
“늘 정상에만 사는 사람은 정상 아래는 벼랑 같고 어둠 같고 지옥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 아래도 사람이 살아요, 시내도 흘러요. 바로 아래는 벼랑이라는 절망보다 오르고 또 오르는, 한 번은 이겨보고 싶은 희망이 있는 거예요.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가까이서 보면 세상을 움직이고 역사를 흐르게 하는 우리의 힘이 보이지 않지만 세도 권력과 금권을 가진 이들의 영향력이 커 보이겠지만, 좀 더 큰 시야로 마치 100년 뒤에 역사를 되돌아보는 눈으로 본다면 분명 세상과 역사의 주인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다. 꽤 크고 복잡하고 어렵게 들리는 이야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로 끌고 와 쉽고 재미있게, 또 신선하게 풀어내는 이가 바로 감독 신연식이다.
흥미진진 배구 경기를 속도감 있고 스펙터클하게 풀어낸 스포츠영화로 즐겨도 좋고,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감독과 선수들이 어떻게 인생의 1승을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을 즐겨도 좋고, 오랜만에 밝고 가벼운 연기를 하는 송강호와 재벌 2세로 변신 큰 웃음 주는 박정민을 축으로 신예 배우들이 얼마나 개성 넘치게 연기했는지 즐겨도 좋고, 세상에 특별출연과 카메오가 이 정도로 쟁쟁해도 되나 놀라도 좋다.
영화 ‘1승’(감독 신연식, 제작 ㈜루스이소니도스, 배급 ㈜아티스트스튜디오·㈜키다리스튜디오·㈜콘텐츠지오), 한 번은 제대로 그것도 내가 제일 잘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로 이기고 싶었던 우리를 응원하는 작품을 만나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