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증 기업 502곳…3년 만에 증가세
유통물량 확대에 기업·주주가치 훼손 우려
고려아연·현대차증권 등 주가 하락세 부각
증시 부양 제한에 “밸류업 역행” 비판 목소리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이 본격 추진되고 있음에도 국내 기업들의 유상증자 규모가 급증하면서 이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명분 없는 유상증자가 속출하며 기업·주주가치를 훼손하고 있어 시장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15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 유상증자를 실시한 국내 상장사는 총 502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2023년·470곳) 대비 6.8%(32곳) 늘어난 수준이다.
특히 지난 2021년부터 유상증자를 단행한 기업들이 소폭 줄어드는 추세였으나 3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해 정부와 금융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밸류업을 추진했음에도 유상증자 시장을 찾은 상장사들이 잇따르면서다.
기업들의 자금 조달 수단인 유상증자는 상장사가 실질적인 자본금 증가를 위해 주식을 새로 발행하고 이를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입된 자금을 통해 자본을 확충하거나 성장 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주식 발행량이 늘어나면서 기존 주식의 가치가 희석된다는 단점도 수반된다. 무엇보다 기업 실적이 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행 주식 수만 증가할 경우 주당이익이 감소하는 만큼 기존 투자자들은 유상증자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통상 유상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은 신규 투자, 시설 확충, 인수합병(M&A), 재무 건전성 확보 등에 활용되지만 지난해 유상증자를 결정한 기업들의 자금 조달 목적은 대부분 성장과 거리가 먼 운영자금, 채무상환자금 조달로 나타났다.
고금리·고유가·고환율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기업들이 유상증자를 통해 채무상환과 운영자금 확보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배경에서 추진된 유상증자는 단기적인 문제 해결에만 그칠 수 있어 주가에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
연이은 유상증자는 주주들의 불만을 심화시켜 결국 상장사들의 주가를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유상증자를 결정한 주요 기업들의 주가를 살펴보면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우선 영풍·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고려아연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난해 10월 30일 2조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이에 하루 만에 주가가 154만3000원에서 108만1000원으로 29.94% 하락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에도 전일 대비 7.68%(8만3000원) 낮은 99만8000원으로 장을 마감해 100만원선을 반납했다.
이 외에도 지난해 11월 26일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현대차증권은 전일(14일)까지 무려 25.23%(8800→6580원) 떨어졌다. 차바이오텍 역시 지난달 20일 2500억원의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한 이후 24.02%(1만4860→1만1290원) 내렸다.
이에 일각에서는 명분이 불분명한 유상증자 계획을 내놓거나 실시한 기업들이 잇달아 등장해 금융당국의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상장사들의 잦은 유상증자가 증시 부양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오면서 밸류업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유상증자를 통해 특정 대주주의 이익은 보장하고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하는 시도가 반복되고 있어 밸류다운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라며 “주주들을 외면한 채 유상증자를 나홀로 결정하는 기업은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막아 밸류업이 아닌 밸류다운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시장에서 밸류업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데 정부와 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을 간과한 채 정책을 추진한 영향도 있다”며 “유상증자 단행시 기존 주주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한다는 내용의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