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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할 수 없었던 '냉장고 정리' [D:쇼트 시네마(107)]


입력 2025.01.28 14:01 수정 2025.01.28 14:01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변성준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잠에서 깬 정원(정준환 분)은 냉장고 문을 열며 엄마를 찾는다. 배는 고픈데 엄마는 보이지 않고 무심코 꺼낸 물마저 상해 있다. 정원은 쇼파 위에서 TV를 보며 엄마를 기다려 본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엄마를 향해 "아들 밥 안차려주고 어딜 간거냐"며 투덜거려도 본다.


그러다가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들을 살펴본다. 반찬은 가득 쌓여있지만 모두 상해있다. 정원은 냉장고 위에 있던 반찬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정리를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정원은 반찬통의 뚜껑을 여는 순간, 엄마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이 음식들을 버릴 수가 없다.


마침 집에 온 동생(한봄 분)은 나열해 놓은 반찬 통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정원을 향해 나갈 준비를 하라고 괜히 성질을 부린다. 옷도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자 잔소리로 슬픔을 피해보려 하지만 정면으로 엄마의 공간이자 손길이 닿은 냉장고와 반찬 앞에서 슬픔을 피할 도리가 없다.


영화 냉장고 정리는 일상의 공간인 냉장고를 통해 상실과 기억,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섬세하게 탐구한다. 주인공 정원은 엄마를 찾으며 냉장고 문을 열지만, 돌아온 것은 텅 빈 부재와 상한 음식들뿐이다. 배고픔을 달래려던 순간, 그는 오히려 냉장고 속 엄마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상한 음식들을 버리려 하지만, 음식들에 얽힌 엄마와의 기억이 떠오르며 쉽게 손을 댈 수 없다.


영화는 냉장고를 단순히 음식의 저장 공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정원이 열어본 냉장고는 엄마의 흔적을 저장한 '기억의 창고'다. 상한 음식들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상징한다. 정원이 음식을 버리려다 멈추는 장면은 그가 엄마와의 연결을 끊을 수 없는 내면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음식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지만, 그것을 버리는 행위는 곧 엄마를 향한 기억까지 지워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상실은 정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우리가 떠나보낸 이들의 흔적과 기억을 버리고 정리하는 것은 물리적인 행위로 종료될 수 없다. 정원에게 냉장고 정리는 음식의 처리 과정이 아닌, 감정의 잔재와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상실이 끝이 아니라 기억의 가치를 다시 품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러닝타임 9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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