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모리’
‘라쇼몽 효과’는 똑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서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세계적인 고전 명작으로 손꼽히는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리메이크 되거나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메모리’ 또한 과거 어린 시절 아픈 기억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조명해 상대를 이해하고 치유하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뉴욕에서 딸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실비아(제시카 차스테인 분)는 성인 돌봄 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한다. 차분하지만 늘 날이 선 듯 경계를 하며 살아가던 그녀의 일상이 달라지게 된 건, 고등학교 동창회 파티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실비아는 시끄러운 파티 자리에서 급하게 빠져나왔고 사울(피터 사스가드 분)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다. 며칠 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실비아는 과거의 잊을 수 없는 악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왜곡과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히려 현재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사울을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
영화는 기억을 테마로 인간의 아픔을 담아낸다. 실비아는 12살 때 선배인 밴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벤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실비아는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힘들고 사울은 기억하지 못해 슬프다. 사울은 부인과 사별 후,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사울이 자기를 성폭행한 벤의 친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고 그 대가로 천벌을 받아 치매에 걸린 것이라며 울분을 토해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기억의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실비아처럼 어린 시절 끔찍한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아도, 사울처럼 기억을 잃지 않아도, 우리는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영화는 기억을 소재로 삶의 다양한 고통을 조명한다.
과거보다 현재의 삶이 더 소중함을 지적한다. 실비아는 잊을 수 없는 과거에 평생 발목을 잡혀 살고 있다. 그때의 괴로운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떠나질 않는다. 중학생이 된 자녀를 키우고 있는 지금까지도 힘겹게 만든다. 남자를 경계하며 집안의 자물쇠는 이중 삼중으로 잠궈 놓는 등 강박증에 시달린다. 딸이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과거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반면에 사울은 현재를 잊지 않기 위해 애쓴다.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실비아와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적고 또 적으면서 메모한다. 매사 날이 서 있고 예민했던 실비아의 상처는 사울로부터 점차 아물어간다. “현재는 선물이다”(Present is Present)라는 말이 있듯이 영화는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시에 사랑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인간 관계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태어날 때부터 가족, 연인, 친구 등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느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상처를 받고 또 치유를 받는 것도 모두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다. 영화 ‘메모리’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일지라도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비아와 엄마와의 관계, 실비아와 딸의 관계, 실비아와 사울의 관계, 사울과 사울 가족의 관계 등 수많은 관계를 자연스럽게 조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결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냉정한 현실 속에서 내 편이 되어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더라도 두려움보다 용기가 생긴다고 전한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기도 하지만 과거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미래를 잃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지나치게 과거에 매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치, 사회, 경제적 환경이 급변하는 대전환기에는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 영화 ‘메모리’는 과거의 잘못된 기억에 매몰되어 불행한 삶을 사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과거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를 보라고 조언한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