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 광주·전남 청년 강연…"갈등이 계엄 만들었다"
2016년 30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대구 지역주의 깨
"다양·포용·민주성 있어야 국민들이 기회" 현 정국 경고
"고맙습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지난 8일 모습은 정치인의 교과서에 가까웠다. 차분하고 친근한 태도로 청년, 지지자 한 명 한 명과 인사와 악수를 건네고, 누군가 주춤대면 먼저 다가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사람이 여럿 몰리면 자연스럽게 호흡을 두고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한 청년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와 노트에 김부겸 전 총리의 사인을 받아갔다. 한 가족은 "총리님이 좋아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지 벌써 몇십 년이 됐다. 참 진실한 분"이라고 말했다. 광주전남 두 번째 일정인 강연회 '탄핵 후 국가 대개혁을 위한 청년의 역할' 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지난 5일,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비명계를 직격했다. 그는 "훈장질하듯이 '야, 이재명. 네가 못나서 지난 대선에서 진 거야' 이런 소리 하고 '너 혼자 하면 잘될 거 같아?' 이런 소리 하면 그게 뭐가 되겠나.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며, 김 전 총리를 향해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자리를 이미 했다. 제3지대에 누굴 모으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책과 유튜브를 많이 보라"고 가르치려 들었다.
현 조기 대선 정국과 2~3%대에 머무는 지지율을 생각하면 물음표가 뜰 수밖에 없는 그의 정치 행보. 이쯤에서 궁금증이 인다. 그는 왜 비명계에 대한 비난이 거센 상황에서 광주전남을 택한 것일까. 김부겸에게 이번 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가능성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정치인 김부겸을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는 '통합'이다. 김 전 총리는 지난 2011년 12월 돌연 대구 출마를 선언했다. 경기도 군포에서 3선을 지낸 그는 "군포에서 4선을 하는 건 월급쟁이 하겠다는 것"이라며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민주당의 마지막 과제인 지역주의를 넘어서겠다"고 선언했다.
2012년 총선에선 대구 수성갑에서 40.4%를 득표하며 파란을 일으켰지만, 보수의 심장으로 여겨지는 대구시민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2014년 두 번째 출사표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했지만, 역시나 40.3%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지역주의 극복의 진정성, 진영을 가르지 않는 정치인의 본보기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총선, 김부겸 전 총리는 대구 수성갑에서 김문수 현 고용노동부 장관을 꺾으며 지난 30년간 공고했던 대구의 벽을 마침내 넘었다. 극단적인 이념 대결보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고, 지역주의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 정치를 종식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 통한 순간이었다.
김 전 총리는 지난 8일 오후 광주 염주체육관 국민생활관에서 열린 '탄핵 후 국가 대개혁을 위한 청년의 역할' 특강에서 "우리 편이 한 것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이 한 것은 무조건 틀렸다'는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 대한민국을 이렇게(계엄 사태) 만든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민주당 내 '일사불란'이 힘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2025년에 요즘에는 통하기 어려운 공식이다. 이른바 '알고리즘'의 시대. 밋밋한 '공존, 대화와 타협'보다 나에게 맞는, '개인 맞춤형 팬덤 정치'가 세를 불린 상황에서 김 전 총리는 너무나 불리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강연에서 "'서울의 봄'이란 영화를 기억하느냐, 민주항쟁 광주에 대해 (광주 젊은 세대들은) 실감이 나지 않을 텐데, 윤석열 대통령 계엄령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됐다"며 "전두광의 권력 야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인생이 구겨졌나.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대한민국 경제는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윤석열의 계엄령은 'GDP 킬러''"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계엄 사태 이후부터 한국 증시에서 증발한 돈이 무려 80조"라며 "그 가운데 대한민국은 경제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부분이 70% 가까이 되는 국가다. 미국에 트럼프라는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 미국의 모순을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이지만, 국경을 봉쇄하고 이민자를 추방하는 등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고 했다.
또 트럼프가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중국에 1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상황 속 중국 수출입 문제로 직격탄을 맞을 수 있는 대한민국 경제를 들어 "미국에 '당신들이 그동안 제조업을 포기했으니까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간 것'이라는 설득을 해줄 수 있는 정부는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고 했다.
김 전 총리는 "다양한 생각, 다양한 목소리, 그리고 조금 거슬리는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는 포용성, 민주성이 있어야만 이번에 국민들이 (민주당에) 기회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 전 총리가 '친명 대 비명' 구도 따위를 말하러 폭설을 뚫고 호남의 청년들을 찾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양극단의 견해를 갖고 있을 때, 또 이같은 신념을 가진 정치적 인물이 다수를 대변할 때 나올 수 있는 여러 부작용을 우려해야 한다는 게 김 전 총리의 생각이다. 대구 출신인 김 전 총리에게 광주·전남 행보는 그 상징인 셈이다.
김부겸 전 총리는 전날에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한 뒤, 취재진과 만나 "민주당의 전통적인 힘은 바로 다양성·포용성과 같은 민주성이 보장될 때의 힘이 국민 신뢰가 가장 컸다"고 밝혔다. 어쩌면 김 전 총리의 광주·전남행은 자신의 지지율, 정치적 입지와는 무관한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