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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쇼’에 당한 코미디언 젤렌스키 [기자수첩-국제]


입력 2025.03.06 06:24 수정 2025.03.06 11:55        정인균 기자 (Ingyun@dailian.co.kr)

TV로 시작해 TV로 완성된 정치인 트럼프

트럼프 기획·밴스 주연의 'TV 협상쇼'

트럼프, 고성 말싸움 뒤 "훌륭한 TV쇼가 될 것"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미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우리가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텔레비전 덕분이었죠”


과거 우리나라의 한 영부인이 인터뷰 도중 했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오랫 동안 받던 오해를 TV를 통해 한번에 풀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요즘은 정치인들이 영상 매체를 통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시대다.


미국에서 ‘텔레비전 덕분에 대통령이 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단연 도널드 트럼프일 것이다. 1960년 미국의 첫 TV 대선 토론에서 리처드 닉슨을 박살낸 존 F 케네디나 TV 광고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 지지율을 급격히 끌어올린 대통령들도 더러 있었지만, 트럼프의 TV 활용능력은 이들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부동산 재벌로 알려졌던 트럼프의 전국 인지도 상승이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 덕분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TV 힘을 깨달은 트럼프는 자신의 정계 진출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정치적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를 문제 삼으면서 강성 지지층을 확보했다. 당시 그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시청률이 높은 각종 TV 토크쇼에 출연해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이때 생긴 그의 팬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핵심 지지층으로 성장했다.


공화당 경선 TV토론과 대선 TV토론 또한 그의 독무대였다. 토론 도중 상대 후보를 조롱거리로 만들 때마다, 방청객이 폭소를 터트려 사회자가 당황 때마다, 기세에 짓눌린 민주당 대선 후보가 말을 더듬을 때마다 트럼프의 지지율은 계속 올라갔다. 이렇듯 비호감 유명인이었던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 인생을 TV로 시작해 TV로 완성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도 TV를 활용해 끝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TV쇼를 제작한 것이다.


주연은 JD 밴스 부통령이 맡았다. 젤렌스키가 회담 도중 “러시아는 외교 관례를 어기고 전쟁을 시작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밴스는 “당신 나라는 미국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며 논점을 흐리기 시작했다. 이어 “당신은 지금 매우 무례하다. 우리가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당신 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는가”고 말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팔짱을 낀 채 이를 듣고 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곧 말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전쟁을 하면 누구나 문제가 생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며 “지금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당신들도 앞으로 느끼게 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때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트럼프가 대화에 개입하면서 고성이 섞인 말싸움이 이어졌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막장쇼가 됐지만 이는 트럼프가 원했던 그림이다. 그는 밴스가 도발하고 자신이 중재하는 장면, 젤렌스키가 말실수하는 장면을 통해 젤렌스키를 ‘미국에 고마워하지 않고 미국 대통령과 싸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의 명분을 만드려던 의도다. 이런 의도는 트럼프가 대화 도중 뜬금없이 “미국 국민이 이 같은 장면을 보게 된 것을 매우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것과 회담 종료 직전 “훌륭한 TV 방송이 될 것 같다”고 한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만 젤렌스키의 지지율 반등은 그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미 유권자 35%만 이번 회담을 “트럼프의 승리”라 평가한 것과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동맹국들이 트럼프에게만 비판을 가한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젤렌스키가 항복하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종전 협상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트럼프는 '트럼프 쇼'가 만든 불필요한 리스크들을 떠안게 됐다.

정인균 기자 (Ingyun@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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