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려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 집권 2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과거 집권 1기 당시 헐리우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립했고 그것이 아카데미상에 그대로 반영됐었다. 이번에 트럼프 정부 2기 출범 직후에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기 때문에 여기서 미 영화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관심이 쏠린 것이다.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을 대놓고 조롱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막상 거행된 시상식에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 영화인들이 트럼프 정부의 노선과 거리를 둔다는 점은 분명히 나타났다.
일단 이번 시상식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블랙핑크 리사의 출연이었다.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팝 가수가 공연한 것이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공연이었다. 이 시리즈는 한국과 아무 상관없는 작품들로, 리사는 이 시리즈의 주제가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이라면 주제가를 직접 불렀던 가수나, 아니면 영미권의 대표적인 가수가 공연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 자리에 케이팝 가수가 초대받은 것 자체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블랙핑크 리사가 그만큼 세계적인 스타라는 뜻이기도 하고 케이팝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영미권에서 가장 유명한 첩보물 시리즈 기념 공연에 아시아인을 초청한 건 이번 아카데미상이 다양성의 가치를 중시했다는 걸 말해준다. 백인 중심주의,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의 노선과 반대인 것이다.
다양성의 가치를 경시한 이에게 아카데미가 어떻게 대하는지는 ‘에밀리아 페레즈’의 몰락이 극명히 보여줬다. 당초 이 작품은 무려 1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올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될 것이 확실해보였다. 이 작품의 주연 배우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여우주연상 수상이 매우 유력했다. 하지만 시상식에선 여우조연상, 주제가상 등 단 2개만 수상할 정도로 몰락했고, 가스콘은 수상은커녕 시상식 사회자로부터 대놓고 조롱받는 모욕을 감당해야 했다.
가스콘이 2021년에 다양성의 가치에 위배되는 게시물을 올린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윤여정과 흑인 배우 등이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것에 대해 "내가 아프리카-한국 축제나 흑인 인권 시위, 3·8 여성대회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썼다고 한다. 2020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 그를 폄하하는 글도 올렸다. 이 때문에 본인의 수상이 불발되고 조롱까지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냉대당한 것이다.
이렇게 ‘에밀리아 페레즈’가 냉대당하는 와중에도 여우조연상은 받았다. 그 상을 받은 조이 살다나는 수상 소감에서 자신이 도미니카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며 “스페인어로 노래하고 연기해 상을 받은 내 모습을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남우주연상은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돌아갔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역할이다. 역시 이민자 캐릭터인 것이다.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작품상·감독상·각본상·편집상 등을 휩쓴 ‘아노라’는 우즈베키스탄 이민자 가정의 2세이며 스트리퍼인 여주인공이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하려 하자 러시아 재벌이 방해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원래 약자,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렇게 약자를 내세우며 러시아 재벌과의 대결 설정을 추가했다. 아카데미 사회자는 이 영화와 관련해 “미국인들이 강한 러시아인에게 맞서는 장면을 보게 돼 신난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최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하며 러시아 편을 드는 것처럼 알려진 것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편집상 시상자가 무대에 올라 “슬라바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장편 다큐멘터리상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판한 ‘노 아더 랜드’에게 돌아가기도 했다. 유대인이 주류인 헐리우드에서 매우 놀라운 시상이며, 트럼프의 친 이스라엘 정책과 상반된 결과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이 비록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시상의 방향성으로 반 트럼프 입장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다. 트럼프 정권 2기 출범 직후에 치러졌기 때문에 이 시상식이 향후 4년간 헐리우드의 트럼프 정권에 대한 태도를 가늠할 시금석으로 여겨졌다. 이번 결과로 미루어, 헐리우드와 트럼프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대립 연대기 2회전이 열린 것 같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