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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광화문 [기자수첩-정치]


입력 2025.03.31 07:00 수정 2025.03.31 07:00        김수현 기자 (water@dailian.co.kr)

윤석열 파면 촉구 국회의원 연대 단식 농성장

구경꾼 몰리며 통행로 방해, 지속 소란스러워

단식은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 수단'

국민 부여한 '입법권'으로 싸울 방안 고민하길

윤석열탄핵국회의원연대 소속 의원들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십자각 인근 농성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파면 촉구 및 헌정수호를 위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민주당 한창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박수현, 진보당 윤종오,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강득구 의원. ⓒ 뉴시스

"여기 앞에 서 계시면 안 돼요. 통행로에 방해돼요."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인근 저녁 시간대, 이날부터 윤석열 파면 촉구를 위한 국회의원 연대 단식을 시작한 더불어민주당 농성장 앞은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행사 진행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인파 때문에 통행에 방해가 되자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래"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길게 위로 빼고 줄줄이 발걸음을 멈췄다.


같은 시간, 외진 곳에 있는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1500여개 단체로 구성된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 대개혁 비상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이 석방된 지난 8일부터 무기한 철야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그 앞은 황량하리만치 인적이 드물고, 적막했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의 단식 농성장도 차분한 분위기 속 드문드문 방문객만 이어졌다.


흔한 비유지만, 순간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을 잃고,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만난 남자와 사귀게 되는데, 그에게 "우리 연탄값도 절약할 겸 같이 동거하자"는 제안을 건넨다. 그렇게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난을 체험'하러 온 부잣집 대학생이었다. 그렇게 소설은 연인이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닌 가난을 배우기 위해 거짓 사랑을 속삭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의 절망으로 끝맺는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흔히들 단식은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 수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와 '원외 인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윤 대통령 석방 당일 며칠 뒤 단식을 시작한 국회의원들의 단식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국회의원들이 싸워야 할 곳은, 분명 광화문이 아니라 국회다. 현 상황은 의원들이 광화문을 탐내고, 훔친 것에 불과하다.


'권력이 없는 약자'들만이 광화문에서 싸울 수 있는 '자격'이 되고, 단식이라는 장치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 따위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국민이 부여한 입법권으로 싸워야 할 국회의원이 광화문에서 취재진과 보좌진들을 줄줄이 달고, 시민사회 단체와 시민들을 방해하는 소란스러운 '단식 정치'를 이어가는 것보단, 현 탄핵 정국과 국민에게 더욱더 도움이 되는 일을 고민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캐피털이코노믹스(CE)는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1.0%에서 0.9%로 하향 조정하면서 "탄핵정국 이후에 정치적 불확실성이 걷혀도 한국 경제가 움츠러들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박완서 선생은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깜깜한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현 정국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이후 침체된 시장경제, 배고픈 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의 심정이 딱 이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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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기자 (wate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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