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열, 3일 만에 영화 톤 잡아줘, 진지하게 고민하는 배우"
연상호 감독의 '계시록'은 맹목적 신념, 믿음이라는 이름의 선택적 현실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의 민낯을 '계시록'에 펼쳐냈다. 연상호 감독은 이 불편한 진실을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믿음과 진실의 경계에 선 인간 군상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계시록'은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가 각자의 믿음을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지난달21일 공개된 '계시록'은 3일 만에 57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영화(비영어) 부문 1위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아르헨티나‧일본‧인도네시아 등을 포함한 총 39개 국가에서 TOP 10에 오르며 글로벌 시청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상호 감독은 '우리는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 질문을 통해, 믿음이란 이름으로 욕망을 정당화하는 현대인의 시선을 포착하고자 했다.
"욕망에 의해서 보고 싶은 걸 보는 걸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그쪽으로 가속화되어 가고 있잖아요. 인간이 가진 본성이기도 하지만, 사회 자체도 외적으로 유도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미디어도 이제 보고 싶은 사람의 취향을 파악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잖아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계시록'이란 영화가 시작됐어요. 영화를 기획할 때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그런 순간을 보여주면 어떨까 싶었죠."
또한 연상호 감독은 시각적 상징을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회'라는 주제를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외눈박이' 이미지가 있다.
"스토리텔링 자체도 어떻게 보면 성민찬이라는 외피, 파멸 같은 게 극적인 아치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해결해야 하는 건 외눈박이죠. 처음부터 너무 대놓고 보여주나 싶을 정도로 외눈박이가 등장해요.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면서도 관객 눈에는 보이지 않길 바랐습니다. 연희도 종국에 가서 일기장을 보는데 아버지가 외눈박이라고 말을 하기 전까지 잘 보지 못해요. 표현으로 인식이 전환이 된 순간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어 뻔히 보이는데도 보지 못하는, 그런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해 보고자 했어요."
연상호 감독은 실종 사건의 진실을 쫓는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의미 없는 것'에 믿음을 갖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확신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때 주목한 개념이 바로 '아포페니아'(apophenia)다. 서로 무관한 현상들 사이에서 의미와 연관성을 찾아내는 이 심리적 메커니즘은 극 중 성민찬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인간의 문화나 역사가 발전되어 온 가장 큰 원동력은 추론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의 음직 영역이 아포페니아인거죠. 그래서 흥미가 있었어요. 무언갈 추론하고, 추론이 잘못됐다는 깨닫기도 하죠. 못 깨닫는 순간은 더 많고요. 그래서 관심이 많이 갖고 있었어요."
성민찬이라는 인물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 배우 류준열의 몰입과 해석이 결정적이었다. 연 감독은 단순히 연기를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인물의 신념과 내면을 정교하게 구축하며 영화의 분위기를 설계해낸 순간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연기하는 것 하나하나에 모두 진지하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기도 장면을 찍을 땐 기도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다 써오고 다니는 교회 목사님에게도 검수를 받아왔더라고요. 촬영 전날에도 거울 앞에서 톤과 표정을 연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장면이 3회차였어요. 영화가 어떻게 찍혀있을지 모르고 성민찬의 감정이 어느 정도까지 가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류준열이 그 장면 하나로 영화 전체의 깃발을 3일 만에 세워준 거죠. 그 장면 덕분에 영화의 톤이 명확해질 수 있었어요."
신현빈 역시 류준열의 대칭점에서 '계시록'을 끌고 간다. 신현빈이 맡은 연희는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이자, 깊은 죄책감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물로, 연상호 감독은 일찌감치 신현빈을 적합한 배우로 떠올렸다.
"신현빈 씨는 '너를 닮은 사람' 드라마를 보고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얼굴 자체에 사연이 있어 보이잖아요. '괴이' 때는 제가 연출하지 않았지만, 신현빈 씨가 출연한다고 해서 반갑고 좋았어요. '계시록'을 만들며 죄책감에 절여져 부서질 것 같은 연희를 구축했고, 누가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괴이' 때 신현빈 씨의 아이 잃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계시록’은 세계적인 거장 알폰소 쿠아론이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로 참여해 제작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연상호 감독의 연출 의도와 주제 의식을 깊이 있게 공유하며 제작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 이야기를 할 때가 한창 코로나가 심했을 때였어요. '정이' 찍으면서 코로나에 걸려 2주 동안 격리해야 하는 동안 첫 미팅이 화상으로 잡혔죠. 제가 가지고 있는 비전을 듣고 싶어 하셨어요. 알폰소 쿠아론은 작품이 감독의 비전과 맞는지 아닌지를 까다롭게 보고 계속 소통하더라고요."
영화는 '믿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들이 이야기에 스며들었다. 특히 교회 공간과 외눈박이 창, 구원의 몸짓 등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인물의 여정과 메시지를 우화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결국 연상호 감독이 '계시록'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건 특정 종교나 인물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하는 우리의 태도다.
"믿음이라는 테마가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이 있기 때문에, 종교적 소재는 우화를 표현하는 데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에도 교회라는 공간이 등장해서 조심스럽게 보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부담은 없었어요.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연희가 구출하는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는, 굉장히 종교적인 상징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어요. 외눈박이 창문에서 구출되고, 그 창이 십자가 형태로 보이기도 하고요. 안긴 자세가 마치 피에타 같기도 하죠. 성민찬 캐릭터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이비를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오히려 이연희의 여정이 일종의 계시처럼 다가오죠. 어떤 소재를 소비하듯 쓰기보다는, 그 방식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고, 그걸 관객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