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성과 지우는 정책, 문화 다양성 토대 흔들려"
2025년,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숨 고르기’ 중이다. 팬데믹을 지나며 극장 문은 다시 열렸고, 몇몇 작품이 많은 관객을 모았지만, 이를 두고 산업 전반이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관객 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제작 편수는 줄어들었으며, 투자는 위축됐다. 하지만 이 시점에 가장 위태로워진 곳은 영화 생태계를 뒷받침하며 창작과 실험을 시도하던 독립영화와 지역 영화제들이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41개 영화제에 50억 원을 지원했지만, 2024년에는 10개 영화제에 24억 원으로 지원 규모를 절반 이하로 줄였고, 2025년 현재는 20개 영화제에 32억 원을 지원한다. 얼핏 겉으로는 점진적인 회복처럼 보이지만, 이는 팬데믹 이전 수준의 60%대에 불과한 수치이며, 그마저도 다수의 소규모 영화제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히 서울독립영화제는 올해 문체부로부터 지원 전액 삭감을 통보받자, 예산 지원을 전면 거부하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50회를 앞둔 서울독립영화제는 독립영화계에서 상징성이 큰 만큼, 이번 사안은 업계 전반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영화제는 신인 창작자를 발굴하고, 실험적 서사를 시험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상업적 프레임 안에서는 담기 어려운, 가려졌던 시선과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이러한 접점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몇몇 영화제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영화의 창작 생태계 자체가 흔들리는 신호다.
예산 삭감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계는 즉각 반발했다. 1만 명이 넘는 영화인과 관련 단체, 관객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정부가 독립영화 지원을 축소하는 배경에는 '효율성 중심'과 '지원 기준 고도화'라는 기조가 깔려 있다.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영화제 정책 토론회에서 문체부는 "자체 수익 기반이 부족한 영화제에 공적 자금을 계속 투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사 기준은 평가 항목을 정량화하고, 행사 운영의 체계성과 관객 친화성을 중심으로 우선순위를 매겼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 기준이 지원의 공공성과 문화 다양성을 오히려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량화된 성과 위주 평가에서 독립·지역 영화제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책 당국은 '지속 가능성'보다 '성과와 효율'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문화예술은 단기 수익이나 즉각적인 소비로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신인 감독의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다음 성공작의 기반이 되고, 소수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가 비록 적은 관객을 모으더라도 그 사회에 꼭 필요한 균열이 되기도 한다.
예산 삭감의 파장은 지역 공동체에도 직격탄으로 돌아갔다.
지역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축제를 넘어서, 지역 내 창작자와 주민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기반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상영작만이 아니라, 영화 교육, 시민참여 프로그램, 지역 로케이션 발굴과 스태프 육성까지 연계되어 있던 구조가 예산 삭감과 흔들리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영화제는 많은 관객이 오는 곳'이라는 인식이 문화행정에 내재되어 있는 한, 자율성과 실험성, 그리고 지역성이라는 문화의 본질적 가치들은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다. 독립영화와 지역 영화제가 약해지면, 결국 산업 전체의 다양성과 역동성 또한 위축된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흐름은 상업영화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상업영화 시장은 관객 수 감소, 투자 위축, 기획력 고갈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 창작의 최전선에서 실험하고 실패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상업영화에도 신선한 인력과 새로운 스토리 구조가 유입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거대 배급망과 OTT 중심의 유통 구조 속에서, 창작의 첫 단추를 끼우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산업 전체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백재호 이사장은 "산업이 위기라는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기초이자 일종의 알앤디(R&D)라 할 수 있는 독립영화와 지역 영화에 대한 지원은 오히려 더 강화돼야 한다. 영화제는 적은 비용으로도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조인데, 당장 가시적인 결과가 없다는 이유로 그런 곳부터 예산을 자르니 생태계 전반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라며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약자나 소외된 영역을 보호하는 것인데,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최근 4~5년간 영화진흥위원회 예산으로 지역 기반 생태계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중단되면서 지역 청년 영화인들이 다시 갈 곳을 잃게 됐다"며 "내년에는 예산이 어느 정도라도 회복되길 기대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계획"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