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 주변국들에 운명공동체 구축 운운하며 추파
美, 관세인하 조건에 중국 제품 수입 축소 요구
베트남·태국 ‘택갈이’ 단속 등 백기 투항 모양새
中, 자국에 불이익 주는 나라에 대해 보복 협박
미국과 중국 간의 관세전쟁이 격화하면서 중국이 ‘야누스(Janus)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앞에서는 주변국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운명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운운하며 어르면서도, 뒤에서는 중국에 불이익을 주는 나라에 대해서는 결단코 보복조치를 취하겠다고 겁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기자와의 문답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 협상을 앞두고 관세인하를 조건으로 중국산 수입 축소 등을 요구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와 관련해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훼손함으로써 이른바 ‘면제’를 받는 것은 호랑이에 가죽을 달라는(與虎謀皮) 격의 아주 무모한 일이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며 영국 BBC방송 등이 지난 22일 보도했다.
그는 이어 “중국은 각 당사국이 평등한 협상으로 그들과 미국의 경제·무역 이견을 해결하는 것을 존중한다”며 “중국은 각 당사국이 ‘상호관세’ 문제에서 마땅히 공평·정의의 편, 역사적 올바름의 편에 서고 국제 경제·무역 규칙과 다자무역체제를 수호해야 한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상무부 대변인은 “중국은 어떤 국가가 중국의 이익을 희생한 대가로 (미국과의) 거래를 달성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만약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면 중국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대등하게 반격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의 겁박은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협상국에 중국과의 무역 축소, 중국산 제품의 우회수출 차단 등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미 언론이 보도한 뒤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행정부가 70여개국과의 상호관세 협상을 앞두고 관세 인하를 조건으로 중국산 수입 축소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기업들이 미국이 부과한 고율관세를 피해 제3국으로 우회 수출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게 트럼프 정부의 의도다.
블룸버그통신도 미 정부가 중국과의 무역거래가 많은 국가에 ‘2차 관세’(secondary tariffs) 문제를 꺼낼 수 있다고 전했다. 2차 관세는 트럼프 행정부가 고안한 새로운 개념이다. 앞서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수입하는 나라에 추가 관세를 매기겠다며 도입한 정책이다.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국가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압박에 백기를 들고 있다. 미국이 46%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자 베트남은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 차단에 나섰다. 베트남 정부는 이달 초 긴급회의를 열고 우회 수출과 지식재산(IP) 침해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베트남 산업무역부와 세관은 우회 수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주 안에 불법 환적 단속 계획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회의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베트남 정부가 이 사안으로 중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불법 환적은 중국산 제품을 베트남으로 들여와서 ‘베트남산’으로 생산국 표시만 바꿔 미국으로 수출하는 ‘택갈이’(태그 바꿔달기) 등을 말한다.
베트남은 군사용으로 전용 가능한 반도체 등 민감 품목의 대중 수출통제도 강화하는 한편 미국산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신고·승인 제도를 도입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상호관세를 22~28% 이하로 낮추는 방안을 미국과 협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도 미국의 36% 상호관세 부과를 피하기 위해 나섰다. 태국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 타결을 위해 다양한 카드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는 옥수수, 천연가스와 같은 미국산 원자재 수입을 확대하고, 태국 내 수입 관세를 인하하며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방안 등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에 대한 검역 및 통관 절차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미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한 목적의 허위 원산지 증명서 제출에 대해 단속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에 격분한 중국은 미국과 협상하는 국가들을 향해 사전 경고에 나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이 최우선 관세 협상국으로 지목한 국가들은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영국, 호주, 인도 등 5개국을 ‘최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지정하고 90일의 상호관세 유예기간 집중 협상에 나섰다.
미국은 주요 우방국과의 협상에서 조기에 성과를 도출한 뒤 중국을 압박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지난 16일 진행된 미·일 1차 관세 협상에서는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향후 협상에선 미국이 일본에 중국과의 교역축소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세계 1·2위 경제대국 간 무역전쟁 여파로 미국, 중국 모두와 거래관계가 많은 국가들이 샌드위치 신세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주변국과 전략적 상호 신뢰와 산업 및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시 주석이 미국과의 관세전쟁이 본격화한 이후 처음으로 내놓은 메시지다. 주변국과 우호적 관계를 도모해 미국의 압박을 헤쳐가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관영 중국중앙TV(CCTV)에 따르면 시 주석은 지난 8~9일 이틀 동안 베이징(北京)에서 ‘중앙주변공작(업무)회의’를 주재했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우리나라와 주변국 간 관계가 현대 이래 가장 좋은 상태”라며 “주변국 구도와 세계의 변화와의 깊은 연계를 위한 중요한 단계에 진입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변국과 운명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주변국과 전략적 상호 신뢰를 공고히 하고, 지역 국가들이 자체 발전의 길을 유지하도록 지원해야 하며, 갈등과 차이를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 주석은 이와 함께 “발전과 융합을 심화하고 높은 수준의 상호 연결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산업 및 공급망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지역의 안정을 공동 유지하고, 안전과 법 집행 협력을 통해 다양한 위험과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는 시 주석이 첫 임기를 시작했던 2013년에 이어 12년 만에 열렸다. 회의에는 시 주석을 비롯해 리창(李强) 국무원 총리,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상무위원장, 왕후닝(王滬寧)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주석, 차이치(蔡奇) 당중앙 서기처 서기, 딩쉐샹(丁薛祥) 국무원 부총리, 리시(李希) 당중앙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과 한정(韓正) 국가부주석 등이 참석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관세율을 125%까지 끌어올린 이날 열린 이번 회의는 격화하고 있는 관세전쟁 등에 대비해 주변국과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으로 관측된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폭탄’을 퍼부어 미국의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열렸다. 이 틈새를 노린 중국의 우군 확보 행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시 주석의 ‘주변국 관계 강화’ 방침은 미국의 대(對)중국 압박 돌파수단 중 하나로 읽힌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웃 국가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를 포함해 14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 미국의 동맹국도 있다.
이들 주변국과 우호적 관계를 도모해 정치·경제적으로 협력하면 미국의 압박을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동맹국에도 상호관세를 부과해 전 세계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도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중국에 유리한 상황이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