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 자원개발과 신항로 개척,
군사-안보 둘러싼 패권 경쟁 가열 속
한국의 최강 조선-쇄빙 역량에
미국 등 각국 러브콜 집중
늘 옆모습에만 익숙한 지구본을 북극점 위에서 한번 내려다보자. 거대한 빙하 덩어리로 구성된 북극 대륙, 그리고 물과 얼음의 경계를 알 수 없는 북극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주위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반도,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섬, 북미대륙의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가 빙 둘러싸고 있다.
우리에겐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척 생소한 곳이다. 오로라 관광하기 딱 좋은 동네라거나, 그 근방 어디선가 겨울왕국 엘사가 ‘렛잇고(Let it go)’를 부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빼면 관심을 가질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춥고 적막한 지역은 역설적으로 요즘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핫 플레이스 중 하나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려서만은 아니다. 북극해 패권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정치-경제-군사적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부닥치는 게 더 큰 이유다. 북극권이 석유, 천연가스, 희토류 같은 자원의 보고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빙하지대가 줄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신항로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태평양-인도양을 거쳐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무역 항로에 비해 운송 거리가 최대 40%까지 단축된다면 물류 업계엔 혁명이나 다름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때부터 언급했던 그린란드 병합 의지를 더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관세전쟁 와중에도 한국 등 여러 나라에 알래스카 LNG 개발사업 참여를 제안하며 ‘북극권 전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 캐나다, 노르웨이 등 연안국들도 일제히 북극 거점 구축과 해양 통제권 강화를 모색 중이다. 중국 역시 ‘빙상 실크로드’ 구상을 통해 러시아와 협력체제를 갖추며 각축전에 참여했다. 요컨대 북극해는 연안국과 비 연안국 모두가 눈독을 들이는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고요하던 북극해가 소란스러워지면서 동시에 주목받는 이슈가 바로 쇄빙선이다. 쇄빙선은 말 그대로 얼음을 깨뜨리며 운항하는 선박이다. 영어로도 ‘아이스 브레이커(Ice Breaker)’로 통칭한다. 극지방에서 자원탐사, 과학연구, 해상수송, 군사작전 등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건조된다.
조선 강국 한국은 쇄빙선 기술에서도 당연히 초일류 반열이다. 특히 한화오션은 극지방 액화천연가스(LNG)를 운송하는 쇄빙선 분야에서 독보적 역량을 갖고 있다. 2014년 지구상에 없던 ‘쇄빙 LNG운반선’ 건조에 처음 도전한 이후 러시아 가스전 야말(Yamal)프로젝트에 투입될 15척을 모두 수주했다. 극지용 탱커, 드릴십 등 연관 기술도 자체 개발해왔다.
이름부터 특별해 보이는 쇄빙선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쇄빙선이라 해서 얼음만 보면 냅다 돌진하는 건 아니다. 자동차 수만 대급 중량의 선박이 빙하지대를 누비는 일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연룟값만 따져도 웬만한 직장인의 몇 년 치 연봉은 순식간에 날아간다. 북극곰이나 남극 펭귄처럼 특이체질을 가진 갑부가 아닌 한 영하 40~50℃를 넘나드는 극한 환경에서 이색 모험을 즐길 이유가 없다. 빙하는 가급적 피하되 불가피할 때 비교적 안전한 지대로 통과하는 게 상책이다.
쇄빙선이 일반 선박보다 훨씬 무겁고 힘이 세다는 특징은 쉽게 짐작할 만하다. LNG운반선의 경우 보통 20mm 강판을 쓰지만, 쇄빙LNG선은 30~40mm의 초고강도 강판으로 무장한다. 얼음과 정면으로 맞닿는 부분은 70mm나 된다. 당연히 뱃값도 50% 이상 비싸다고 보면 된다.
쇄빙선 이미지는 코뿔소를 연상케 하지만 얼음 깨는 요령은 코뿔소보다 지혜로운 편이다. 꼬리 쪽 프로펠러에서 나오는 강한 추진력을 이용해 뱃머리가 얼음 위로 올라타면서 체중으로 눌러 깨뜨리는 게 일반적 방식이다. 그래서 쇄빙선 앞머리는 대개 매끄러운 예각 형태다. 이런 영리한 신공으로 보통 1~2m 두께의 얼음을 깨며 나아간다.
LNG운반선처럼 덩치가 큰 녀석은 정면충돌 방식도 쓴다. 이 과정에서 추진력과 쇄빙력 관계를 계산해내는 고난도 수학이 필요하다. 가령 최대 2.1m의 얼음을 깨고 가는 데 얼마의 힘이 필요한지 모르고 무작정 들이받다간 타이타닉 신세가 될지 모른다, 또 자칫하면 얼음 지옥에 갇힐 수 있어 전 방향 급선회나 후진 쇄빙 같은 기능도 갖춰야 한다. 주요 장비가 혹한을 견뎌내도록 내한 장치를 갖추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과 쇄빙’ 양대 비급을 보유한 한국에는 각국의 러브콜이 집중되고 있다. 가장 절박한 곳은 역시 미국이다. 당장 LNG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알래스카 북부는 겨울철에 광범위한 결빙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러시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해양 순찰, 수색구조 등 안보-군사적 소요도 시급하다.
이에 비해 미국이 보유한 쇄빙선은 해안경비용 1척이 사실상 전부다. 조선산업마저 쇠락해 신규 건조를 위해선 가성비와 신속성이 탁월한 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겐 관세 협상을 비롯한 한미 통상교섭에서 유용한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극지 과학연구 강화 차원에서 차세대 쇄빙연구선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극지연구소는 2009년부터 첫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운영해왔지만 남·북극을 모두 탐사하기 버거워진 상황이다.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배수량 1만 6560톤으로 아라온의 2배가 넘고 1.5m의 얼음을 깰 능력을 갖추게 돼 향후 극지 활동 역량이 대폭 확충된다.
쇄빙선에 관한 이해도가 좀 높아졌다면, 이제 북극 지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대륙과 섬으로 둥글게 싸인 북극해가 한 잔의 아이스커피처럼 친숙하게 보이지 않는가. 우리에겐 세계적 쇄빙선 기술뿐 아니라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팥빙수를 즐기는 독특한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DNA가 있다.
북극해는 더 이상 춥고 적막한 곳이 아니라 신비로운 맛과 향을 간직한 미지의 해양 세계다. 그 아름다운 얼음 바다가 한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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