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지로버 벨라 P400 시승기
무뚝뚝한 얼굴 속 질리지 않는 다정함
구름 위 떠가는 듯 '두둥실' 주행감
"이 돈 주고 사기엔"… 아픈 손가락의 애매함
한 때 국내 고급 SUV 시장을 마구 흔들어놓다가 최근 입지가 좀 줄어들긴 했지만, 어쩐지 '레인지로버'라는 이름이 주는 정제된 이미지는 여전한 듯 하다. 판매량이 줄었다 하더라도 고급 식당 주차장에선 꼭 한 대씩 서있고, 잊을 만 하면 도로 위에서 속도감을 뽐내기 일쑤다.
문제는 유난히 레인지로버 라인업 중간에 껴 존재감을 발하지 못하는 벨라다. 국산부터 수입산까지 중형 SUV 라인업이 탄탄해지는 분위기 속 1억 2000만원대라는 비싼 가격으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아픈 손가락. 벨라는 레인지로버의 줄어든 입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그래서 직접 시승해봤다. 서울 도심과 고속 주행로 등을 약 150km 가량 골고루 주행해봤다. 시승모델은 뉴 레인지로버 벨라 P400 다이내믹 HSE 트림으로, 가격은 1억2420만원이다.
깔끔하고 예쁜데 밋밋한 맛. 레인지로버의 모든 라인업에서 공통적으로 풍기는 지독할 정도의 깔끔함은 벨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럭셔리 수입 브랜드들이 브랜드 특유의 고유한 디자인을 모든 라인업에 적용한다고 하지만, 레인지로버는 그 '특유의 맛' 마저 옅은 편이다.
벨라의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면 일부러 멋을 낸 곳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다. 얼굴만 봐도 적당한 크기의 그릴과 양쪽으로 짙게 찢어진 헤드램프, 중앙을 가로지르는 '레인지로버' 엠블럼이 사실상 전부다. 굳이 굳이 찾자면 소속감을 알리는 랜드로버 표식이 그릴에 작게 걸쳐있다는 점 정도다.
측면 역시 무심하기 짝이없다. 캐릭터 라인이라도 한줄 넣어줄 법 하건만 만지기도 미안할 정도로 깔끔하게 비웠다. 쿠페형 SUV지만 완만하게 떨어지는 루프라인 덕에 눈에 띄게 쿠페 모델을 보고 있다는 느낌도 웬만해선 들지 않는다.
후면도 전면과 동일한 모양의 리어램프로 통일감을 맞추면서 아주 단조롭게 마무리됐다. 양쪽 리어램프를 검은색 띠로 하나로 이어놓으며 차폭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눈에 확 띈다거나 시선이 가는 포인트는 아니다.
외부를 돌아보며 느꼈던 감정은 차 문을 열고 난 이후 한 치의 오차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크게 놀랄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정제된 고급감이 차 곳곳에 묻어있다. 독특한 디자인 포인트나 소재도, 알록달록한 앰비언트 라이트도 벨라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1억 2000만원을 눈에 보이는 화려함으로 보상받고 싶은 이들은 눈을 돌리는 편이 좋겠다.
벨라는 밋밋한 와중에 최소한의 것들로치 최대치의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베이지색과 블랙의 투톤 컬러가 아주 조화롭고 교묘하게 배치된 곳곳의 디자인이 대표적이다. 특히 스티어링휠이 이색적인데, 스티어링휠의 안쪽은 베이지색, 바깥쪽은 블랙 색상으로 마감됐다. 시트 역시도 대체로 베이지톤으로 마감하면서 가장자리에 블랙 컬러를 적용했다.분명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만족스럽다.
다만, 진중하고 정제된 고급감에 치중한 나머지 미처 마련하지 못한 수납공간은 아쉬운 요소다. 디스플레이 하단에 배치된 수납공간이 유난히 좁게 느껴졌는데, 기어노브 주변을 감싼 나무 소재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인 듯 하다. 활용성에선 수납공간 만큼 중요한 게 또 없는 만큼, '가죽으로 덮인 조수석 대시보드라도 파냈다면…' 하는 아쉬움이 끝없이 샘솟는다.
참 묘한 것은 이런 내외부 디자인을 보고 있어도 크게 서운하지는 않단 점이다. '목걸이, 귀걸이 따위 하지 않아도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무언의 자신감이 몸 전체에 뿜어져 나오기 때문일까. 명품이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고급스러움이 흘러 넘친다는 '올드머니'의 철학을 자동차에서 보고 있는 듯 했다. 특색 없는 밋밋함이 오히려 특색이 된 셈이다.
성격은 또 얼마나 진중한 지 모른다. 레인지로버 벨라는 목소리 한 번 높이는 법이 없는, 매사에 차분하고 정돈된 성격을 가졌다. 가속페달을 밟으면 밟는대로, 속도를 줄이면 줄이는 대로 아주 차분하고 부드럽게 해낸다.
레인지로버 벨라 P400 다이내믹 HSE는 3.0리터 직렬 6기통 인제니움 터보 엔진과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MHEV)이 결합돼 최고출력 400마력, 최대토크 56.1kg·m의 성능을 낸다. 8단 자동변속기와 조합돼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5.5초 만에 도달하며, 최고속도는 250km/h다.
그렇다고 해서 심심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벨라의 매력은 고속 주행에서 극대화됐는데, 특히 어떤 브랜드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구름에 떠가는 듯한 '두둥실'한 주행감이 일품이다. 가속페달을 아무리 급하게 밟아도 마치 비단길을 달리는 듯 부드럽게 가속해내고, 너무 부드럽게 속도를 올려낸 나머지 속도감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가속시 묵직하게 울리는 엔진소리는 경박하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운전자가 아무리 포악할 지라도 단숨에 안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깊은, 성품 좋은 어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느 순간 쯤 되니 벨라에 걸맞는, 차분하고 신사적인 주행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몰려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걸까.
뼛속 깊이 새겨진 오프로드 DNA는 운전자에게 안정감을 더해주는 요소다. 이 비싼 차를 갖고 굳이 오프로드 코스로 뛰어들진 않겠지만, 어떤 노면과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동급 경쟁 모델과 비교해도 가지기 어려운 종류의 만족감이다. 수수하고 꾸밈 없는 디자인으로 럭셔리를 말하는 자신감에는 기본적인 실력이 깔려있는 듯 하다.
연비는 아쉽지만 감내할만 한 수준이다. 150km를 달리고 난 후 확인한 연비는 9.3km/L. 공식 복합연비(8.2km/L)와 비교하면 준수하지만, 중형 수준의 몸집으로 10km/L를 넘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아쉽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택 하더라도 복합 연비는 9.1km/L 수준이니 레인지로버를 탄다는 만족감과 바꾸는 것이 좋겠다.
시승을 마치고 나니, 동급 럭셔리 수입 모델과 비교해 대단히 우위에 있다거나 꼭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함께 몰려왔다. 돈 벌면 모두가 화려한 차를 구매하려는 시대에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손함과, 한 번이라도 타본 이들은 만족하는 훌륭한 됨됨이까지. 적어도 보여지는 것보다 '나를 위한' 차를 고민한다면, 한번쯤 고려해볼 만 하다.
▲타깃
-"말로 하는 건 싫은데"… 올드머니 지향하는 당신
-다 똑같은 차 말고, 특별해지고 싶은 당신
▲주의할 점
-주변사람에게 몇번이고 왜 샀는지 설명할 각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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