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혜영의 등장과 동시에 탄성이 터졌다. 샛노란 머리카락을 틀어올리고 긴 로브를 걸친 그에게서 진한 카리스마와 강력한 아우라가 풍겼다. 단숨에 현장을 압도하는, 영락없는 조각의 모습이었다.
이혜영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취재진을 만나 영화 '파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4월 30일 개봉한 영화 '파과'(감독 민규동)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을 처리하는 신성방역에서 40년 간 활동 중인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 분)과 그를 쫓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 분)의 강렬한 대결을 담은 액션 드라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파과'는 이색적인 소재와 이혜영의 액션 연기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혜영은 조각의 힘에 대한 궁금증으로 영화에 합류하게 됐다고 전했다.
"소설로 '파과'를 먼저 접했다. 그때 남들에게 전설로 불리게 된, 또 남들이 그렇게 믿게 된 조각의 수수께끼같은 힘은 뭘까, 그 원천은 뭘까. 그런 궁금증이 있었다. 영화가 어떻게 될지도 궁금했다. 킬러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민 감독이 영화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제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좋아하는데, 그런 식의 판타지가 있으려나 생각했다."
다만 예상과 다른 촬영 현장에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혜영이다. 부상이 계속됐고, 불안감도 이어졌다.
"무덤에 빠지는 장면을 찍다 갈비뼈가 부러졌다. 숨을 못 쉬겠더라. 그런데 촬영 일정은 이미 잡혀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 상태로 했다. 하다가 갈비뼈가 하나 더 나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들었다. '이거 몸 망치고 영화 제대로 안 나오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감과 고독이 밀려오더라. 그 외에도 부상은 계속 입었다. 그러니 연기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었고 감정과 기술의 경계에 서서 촬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촬영 내내 두렵고 불안했다."
투우 역을 맡은 배우 김성철과의 묘한 텐션 또한 관전 포인트였다. 불꽃 같은 투우와 얼음 같은 조각의 케미스트리에 호평이 쏟아졌지만, 이혜영은 이를 김성철의 공으로 돌렸다.
"김성철이 없이 조각과 투우와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 가능할까. 김성철은 저돌적이면서도 청순한 면이 있고 용감하다. 조각과 투우의 케미스트리는 그 자체의 힘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특별히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김성철의 존재 자체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조각에게 섹스 어필이 느껴진다면 그건 성철이가 만든 거다. 내가 홀리려고 한 것도 아니니까."
'60대 여성 킬러'를 소재로 잡은 만큼, '파과'는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가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로 인해 탄탄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구병모 작가와 민규동 감독에게 먼저 감사하다. 그런데 사실 여성 서사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배우를 처음 하려고 하던 시절에 비하면 남성의 상대역이 아니여도 여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많아졌다. 그런데 그걸 기뻐해야 할까? 자존심 상한다. 여전히 우리는 멜로물의 여자 주인공에 대한 무엄함이 있지 않나. 이미 여자라고 이름 지어지면 그때부터 선입견이 시작된다. 그래서 난 연기자로서 여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한 인간이다."
1981년에 데뷔해 약 44년째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이혜영. 그는 촬영하며 조각과 함께 '쓸모', 더 나아가 '쓸모없음'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털어놨다.
"이번에 민 감독과 함께 하며 '내가 쓸모있는 배우로 살아남으려면 민 감독의 프로세스에 익숙해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기술적으로 적응하되 나만의 창의력을 담기가 쉽지 않다. 그걸 해내야 쓸모있는 배우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쓸모없음에 대한 생각을 작업 하면서도 했고 조각을 생각하면서도 했다. 조각은 '그래도 상실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아'라며 여유를 갖는데, 그 말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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