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또 다른 표현 [조남대의 은퇴일기(72)]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5.07 14:08  수정 2025.05.07 14:08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듣는 처지에서는 귀에 거슬리고 불필요하게 느껴지지만, 상대방은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짜증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한낱 불평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한 케리어 ⓒ

아내가 “친구들과 남프랑스로 열흘 동안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해외여행 다녀온 지 얼마 되었다고 또 간다는 거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뜻밖에도 “알았어”였다. 후폭풍이 두렵기도 하지만 홀가분할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잔소리 없는 열흘이라니.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미안해할 때 큰소리를 쳐야 하는 법. “밥은 어떻게 하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가기 전에 반찬이랑 다 챙겨 놓고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라며 미소 짓는다. 출국 날이 다가오자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풍긴다. 콩나물,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같은 밑반찬을 냉장고에 가지런히 채운다. 하루는 마트에 가자고 하더니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즉석조리식품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출국 날짜가 은근히 기다려진다.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어둔 반찬 ⓒ

공항버스가 출발하고 아내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자유롭다 못해 설레기까지 한다. 침대 한쪽을 차지하던 온기가 사라졌는데 허전함보다 양팔을 벌려도 아무도 밀쳐내지 않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저녁 먹고 들어간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던 습관도 구속이었나. 해방감에 들뜬 것도 잠시, 하루 이틀 지나자 집 안이 깊은 산속의 절간 같다.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젓가락질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울림이 아내의 부재를 실감 나게 한다. 떠난 지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사흘 지났을 뿐이다. 친구들과 여행이 즐거워 푹 빠졌는지 카톡 하나 없다. 이렇게 무심할 수가. 남은 일주일이 아득하다. 문득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그립다. 오기만 해라. 무슨 잔소리든 기꺼이 들을 것이니. 결국 사람은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아내의 밝은 모습 ⓒ

아흔여덟의 장모님과 여든여덟의 어머니를 시골 농원에서 보름 동안 모시고 지낸 적이 있다. 따뜻한 봄볕 아래 지팡이를 짚고 보행기를 밀며 시골길을 산책할 때 두 분의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 지나고 서로의 어색함이 사라지자 “비가 오는 데 모자도 안 쓰고 일하느냐”. “군불을 땔 때는 꼭 곁에 있어야지 왔다 갔다 하다간 불 꺼질라” 등의 말씀을 하신다. 정겨웠던 목소리가 점점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듣고 있으면 끝이 없어 보인다. “어머니 저도 환갑이 넘었는데 잔소리 그만 하세요. 다 알아서 합니다”라고 언성을 높였더니 주춤해지신다. 오랜만에 시골에 와서 기분이 좋으셨는데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얼마나 머쓱했을까. 불쑥 뱉은 말이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때는 몰랐다. 단순한 간섭이 아니라 자식을 향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죄송하고 후회스럽다.

농원길을 다정히 거니는 어머니와 장모님 ⓒ

돌아보면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허벅지 골절로 목발을 짚고 다니던 자식이 삐끗할까 봐. 비탈진 땅에서 일하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불안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게 자식은 위험한 곳에 서 있는 듯 위태로워 보이는 존재가 아니던가. 어머니의 눈에는 단지 어린애일 뿐이다. 하지만 그때는 잔소리로만 들렸다. 속 좁은 자식이었기에 따뜻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두 분 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적막한 밤이면 이따금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다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모든 말씀을 가슴에 새길 텐데.


며느리가 농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 ⓒ

세월이 흘러 잔소리를 듣기보다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때는 귀찮고 불필요하게만 들렸던 말을 내뱉고 있다. 아들딸이 벌써 사십 줄에 들어섰건만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 자식으로 보인다. 만나거나 통화할 때마다 “운전 조심해라”. “감기 걸리지 않게 마스크 잘 쓰고 다녀라”. “양보하며 살아라”와 같은 말들을 반복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들을까. 불필요한 간섭이나 익숙한 소음 정도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어머니께 했던 것처럼 “잔소리 그만 하세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쓰다 달다는 표현 없이 묵묵히 듣고 일어서는 것을 보면 마음 한편으로는 그 말들이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청출어람이랄까. 나보다 훨씬 성숙한 것 같아 흐뭇해진다.

노파심에서 아들에게 충고하는 아버지 ⓒ

사람들은 간섭받는 것을 싫어한다. 쓸데없는 참견이나 불필요한 꾸지람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그것은 오랜 세월의 경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얻은 걱정과 배려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텐데. 부모의 이야기는 단순한 간섭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보호막과도 같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치관과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잔소리와 충고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진다. 나이 들수록 자기 생각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강해짐에 따라 잔소리라는 형태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는지. 인생 후반기에 숙고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어른이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모습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잔소리는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짜증 나게 할 뿐이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충고의 내용과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잔소리가 되느냐 약이 되느냐로 갈라질 터. 시간이 지나고 인생의 계절이 바뀌면 그 말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잔소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겠노라고 마음먹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듣기 싫은 이야기가 아니라, 따뜻한 바람결처럼 스며드는 애정 어린 속삭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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