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극장으로㉒] 서울 도봉구 창동극장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우연인 듯 필연, 창동과의 인연
서울 도봉구 창동, 번화한 대학로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곳에는 10년의 세월을 꿋꿋이 지켜온 소극장 ‘창동극장’이 있다. 극단 ‘허리’를 이끌며 30년 넘게 연극 외길을 걸어온 배우이자 연출가, 극작가인 유준식 대표에게 창동극장은 일곱 번의 실패 끝에 여덟 번째로 일군, ‘칠전팔기(七顚八起)’ 정신의 산물이다.
유준식 대표가 창동에 터를 잡게 된 것은 2013년, 네네치킨((주)혜인식품, 현철호 회장)의 파격적인 후원이 계기가 됐다. 1990년 의정부에서 극단 ‘허리’를 창단해 경기북부와 대학로, 전국을 누비며 활동하던 그에게 네네치킨 경영본사 건물 한 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기한 제공하겠단 제안이었다. 설립 비용과 임대료, 운영비용 등을 감당하기도 힘든 민간 극단에게 소극장을 갖는다는 건 그야 말로 ‘꿈’과 같은 일이다.
유 대표는 이 자리를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지 않는다. 창동엔 과거 서울시가 운영하던 900석 규모의 ‘창동열린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작’과 ‘문화수혜’를 주요 가치로 운영되던 이 극장이 폐관되고, 유 대표는 기적과 같은 후원의 기회를 창동열린극장의 가치를 이어가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창동’이라는 이름엔 은연중 ‘창작의 동네’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란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이름을 이어받듯 극장 이름을 ‘창동극장’으로 명명하고 창작, 또는 창작의 가치가 느껴질 만한 작업들을 주로 해왔습니다. 그리고 창작, 창조의 본질 중에는 ‘로컬’의 중요성도 있기에 서울시에서 가장 소외지역으로 꼽히는 도봉구의 지역문화운동에도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10년의 무게, 창작의 고통과 보람
소극장, 특히 대학로가 아닌 변두리에서 창작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은 “거의 희생적 문화운동 개념”이라고 유 대표는 토로한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빚을 지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럼에도 창작의 산실로 가보자는 자긍심으로 버텨왔지만, 좋은 일 하자고 모인 단원들이 빚쟁이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야 말할 것도 없었고요. 그럴 때마다 빠져나가는 젊은 단원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연속성을 가져야 할 작업이 거듭 동력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습니다.”
유 대표는 극단을 1990년 창단한 이후 극장을 짓고 허물기를 일곱 번 반복했다. 그리고 창동극장이 그의 여덟 번째 극장이다.
“칠전팔기라더니 옛 어른들 말씀 이 틀린 게 없어요. 네네치킨 후원으로 이제는 극단 경영이 망해도 길거리로 나앉지는 않게 됐으니까요. 우리가 동력을 잃을 때마다 하늘이 도와주곤 했는데, 그게 바로 인복인 것 같아요. 극단 허리 운영위원장님이신 사승언 정신병원장님과 네네치킨 현철호 회장님 이하 많은 분이 우리 극단과 극장을 후원해주고 있습니다. 또 무엇보다 소멸되지 않고 꿋꿋하게 달려올 수 있었던 근본적 에너지는 그 험한 고난의 길을, 모닥불 위의 양처럼 희생에 희생을 당해도 당당히 버텨주고 있는 이왕일, 박정근, 유희오, 이경민, 유희리 등 골수 단원들 덕분입니다.”
‘창동’(創動, Creative Action), 창동극장만의 정체성
유 대표는 지역명 ‘창동(倉洞)’에 연유했지만, 이들이 지향하는 바와 어감이 맞아떨어져 ‘創動(Creative Action)’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창작의 산실(産室)’, ‘맘껏 만들어보는 극장’이라는 의미다. 이런 기조 아래 만들어지는 자체 기획 공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주제’와 ‘진실성’이다.
“우리 극단이 의정부에서 창단한 이유 중 하나는 휴전선 밑동네라는 점이었습니다. 민족 분단에서 비롯된 부조리를 살펴보는 작품을 주로 해왔습니다. 흥행을 먼저 염두에 둔 기획은 지양하려 합니다. 또 시대가 변하고 유행이 변해도 결코 변치 않아야 할 연기 기술의 원초는 ‘진실’이라고 고집합니다. 리얼리즘이 아닌 작품일지라도 배우가 진실에 100%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이들이 선보인 세미-뮤지컬 ‘환향’ ‘황소탈’은 극장의 색깔을 가장 잘 담고 있다. ‘환향’의 경우 극단 허리의 창작품이면서 극단이 주력하는 주제를 잘 표현했고, 창동극장의 공간적 장점을 잘 활용해 소극장임에도 무한한 시공간을 표현했다는 평가다. 가족극인 ‘황소탈’은 풍성한 시공을 소극장에서 표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두 작품 모두 1000석 이상 대극장에서도 성공적으로 공연됐으며, 소극장의 섬세함과 대극장의 스펙터클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이다.
유 대표는 기초예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장기적인 정책 지원을 촉구하면서도, 칠전팔기의 노장답게 자구책을 마련 중이다. 시대에 맞춰 극예술을 미디어로도 보급하고, 창동극장도 스튜디오 시설을 겸비하여 대관 예술가들의 확장을 꾀하고자 한다.
“우리는 ‘Korean Theatre’가 위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DNA가 내재된 생산물로서의 연극 말입니다. 이미 케이 컬처 웨이브의 한 원본인 연극에 이목이 집중될 것입니다. 창동극장은 35년 전부터 꿈꾸고 준비해온 ‘우리나라 연극’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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