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어떻게 캐릭터가 되는가 [영화 속 공간 설계자들①]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05.20 07:21  수정 2025.05.20 07:21

공간이 만든 서사, 한국 영화 미술의 진화


영화 속 공간은 단순히 장면을 채우는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어떤 공간은 말보다 빠르게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래서 미술감독에게 공간 및 소품 설계란,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지탱하는 가장 직관적인 언어를 완성하는 작업이다.


낡은 벽지의 색감, 창틀의 위치, 식탁 위의 시계, 커튼 사이로 비친 빛 등 사소한 디테일은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증폭시키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감각적으로 변주된다.


ⓒ'그대 안의 블루', '장화홍련', '아가씨', '해적: 바다로 간 산적' 스틸 컷

극의 감정과 현실을 조율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술감독의 역할이다. 인물이 실제로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미술감독들은 인물의 전사, 취향, 습관, 경제적 상황까지 상상해 공간에 반영한다. 이러한 설계는 장면마다의 감정적 설득력을 높이고, 서사의 신뢰를 완성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로 기능한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 영화 산업에서는 미술감독(Production Designer)이 일찌감치 독립된 창작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1920년대 MGM 스튜디오의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William Cameron Menzies)는 ‘바그다드의 도적’(1924)을 통해 영화 속 미술감독의 독창적 비전과 영화적 영향력을 할리우드에 화두를 던졌다. 이후 그는 1‘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93)에서 미술감독의 역할을 명확히 정립하며 영화 전반에 걸친 시각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작품의 비주얼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는 혁신을 시도했고, 이를 위해 당시 이례적으로 스토리보드를 직접 제작해 촬영 계획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미술과 연출의 긴밀한 조율을 이끌어냈다. 이에 미술 분야가 영화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대중과 업계에 확산시켰다.


반면, 한국 영화계에서 미술감독이 지금처럼 독립된 창작자로 인정받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과거에는 연출부가 세트와 소품, 공간 배치까지 도맡는 것이 관행이었고, 미술은 흔히 ‘보조 기술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가 한국 영화 최초로 체계적인 아트디렉션 시스템을 도입하며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작품에는 안상수, 신보경 감독이 아트디렉터로 참여해 감각적인 색채와 공간 미장센을 선보였고, 이를 통해 한국 영화의 영상미를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헤어드레서’(1995)에서는 무대미술가 윤정섭이 영화 미술을 전담하며, 언론을 통해 영화 미술 분야가 보다 대중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1998년 개봉한 ‘퇴마록’에서는 조화성, 심상욱이 각각 미술과 프리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하며, 아트디렉터와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영화 미술을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라, 세계관과 감정선을 설계하는 창작 파트너로 확장했고, 이는 오늘날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 데 초석이 되었다.


같은 해, 최병근 미술감독이 참여한 영화 신장개업을 통해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서류에 기록되며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도 마련됐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장화, 홍련’과 ‘올드보이’를 통해 한국 영화 미술은 한층 완성도 높은 미학적 정점에 도달한다. 조근현 미술감독이 참여한 ‘장화, 홍련’은 낡고 폐쇄적인 집이라는 공간 설정만으로 억압과 공포, 가족 서사의 균열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참여한 ‘올드보이’ 역시 주인공이 15년 동안 감금됐던 차갑고 단조로운 방을 통해 복수극의 심리를 강렬하게 시각화했다. 이 두 작품은 미술감독의 창작적 기여가 대중과 평단 모두에 선명하게 각인된 결정적 순간으로 평가된다.


작업 과정도 더욱 정교해졌다. 미술감독들은 시나리오와 콘티는 물론, 캐릭터 설정표, 시대와 지역에 따른 생활 양식, 배우의 신체조건과 생활 동선까지 면밀하게 검토한다. 때로는 인물의 이력서를 직접 작성하고, 설정된 주거지에 맞춰 실제 부동산 매물과 공간 구조를 조사하는 등 현실적인 감각을 더하는 것도 미술감독들의 몫이다. 즉, 공간은 그럴듯한 꾸밈이 아니라 인물의 삶이 지나간 흔적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감각적 설계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영화 ‘아가씨’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벌칸상’(Vulcan Award of the Technical Artist)을 수상하며 한국인 최초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벌칸상은 칸 공식 경쟁부문 초청작 중 미술, 음향, 촬영, 편집 등 기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유일한 기술 예술상이다.


오늘날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계에서는 미술감독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영화의 시각적 콘셉트와 세계관을 설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미술상은 작품상, 감독상과 함께 영화 완성도를 평가하는 주요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 칸 영화제 벌칸상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술의 창작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상으로, 단순한 기술 구현을 넘어 영화적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작품의 미학을 완성한 기여도를 평가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채경선 미술감독이 시즌1에 이어 시즌2로 다시 한번 미국 미술감독조합(ADG)상을 수상하며, 한국 미술감독의 이름을 높였다. 특히 ‘오징어 게임’의 세트는 비현실적 공간에 현실적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강렬한 색채와 구조적 긴장감을 절묘하게 결합한 설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지아 미술감독 역시 '라듸오 데이즈', '마이웨이',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등 국내 작품을 비롯해 미국 '블랙 팬서', 중국 '막후의 왕', '혀끝의 두근거림', '적열', '위험한 그녀', 그리고 아마존 프라임 오리지널 시리즈 '버터플라이'(가제)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한국 미술감독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초록물고기'부터 '한산: 용의 출현'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공간을 설계해왔고, 한아름 미술감독은 '킹메이커', '길복순' 등을 통해 장르성과 감정선을 조율하는 자신만의 미술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미술은 배경 연출을 넘어,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감정의 결을 공간에 녹여내고,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이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 프리프로덕션 관계자는 “미술 배경은 이미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이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만큼이나,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성패를 가르는 시대다. 하지만 해외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한국 영화 산업에서는 미술감독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창작 환경이 충분하지 않다”라며 “한국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보다 더 체계적인 시스템적 변화가 필요하다. 미술감독들의 상상력과 손끝에서 완성될 다음 장면이야말로, 한국영화가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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