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진화하는 기술…효율과 리얼리티 사이 [영화 속 공간 설계자들②]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05.21 03:45  수정 2025.05.21 03:45

AI와 CG 시대, 미술감독의 존재 이유를 묻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미술·세트 파트는 인물의 삶과 서사를 공간에 새기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영화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제작비와 투자가 축소되는 흐름 속에서, 세트 제작과 소품은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대작을 제외한 중저예산 영화가 시장의 주류로 옮겨가면서, 물리적 공간 대신 CG와 가상 세트로 화면을 채우는 일이 급격히 늘었다. 과거 같으면 세트로 구현했을 장면들이 이제는 CG로 대체되는 것이 당연해진 상황이다.


한 영화 관계자는 “이제 영화에서 미술팀은 가장 먼저 줄일 수 있는 비용 항목으로 취급된다. 과거엔 100억 이상 투입되는 작품들은 20억 원 이상 배정하던 세트 예산이 최근에는 5억~7억 원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AI나 CG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장면들은 쉽게 구현할 수 있지만, 관객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CG와 VFX 기술 발전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로는 영화 ‘외계+인’이 꼽힌다. 외계인과 우주선, 로봇 등 주요 요소는 모두 CG로 구현됐고, 고려시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도 대부분 가상 공간에서 완성됐다. 이 영화의 VFX 작업은 ‘미스터 고’, ‘신과 함께’ 시리즈로 유명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맡았다. 특히 인상적인 외계 비행선 주차장 파괴 장면은 실제 주차장에서 조도와 광원을 측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물리적 시뮬레이션을 거쳐 현실감 있는 파괴 장면으로 완성됐다.


ⓒ'외계+인' 스틸컷

‘한산: 용의 출현’은 해상 전투 장면 대부분을 100% CG로 구현하며 기술적 완성도를 선보였다. 김한민 감독은 “명량 때만 해도 바다에 직접 배를 띄워야 했지만, 이제는 물의 움직임까지 CG로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어 물리적 세트가 필요 없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학익진 전투 장면은 강릉 스피드스케이트장에 조성된 3000평 규모 세트에서, 초대형 그린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물속 장면 일부만 수조에서 촬영하고, 나머지 바다 장면은 모두 CG로 대체했다.


ⓒ'한산: 용의 출현' 스팃컷

이러한 촬영 방식은 배우들의 연기 방식도 변화시켰다.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은 “‘한산’의 전투 장면에서는 단순히 싸우는 동작만이 아니라, 지금 전투 상황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물살의 흐름은 어떤지, 적의 위치와 전황까지 모두 인지한 상태로 연기해야 했다”며 “우리가 수세에 몰린 건지, 반격을 준비해야 하는 건지에 따라 표정과 감정도 달라져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감독님과 CG팀이 처음부터 끝까지 애니메틱 보드를 통해 상황과 동선을 정확히 보여주셨다. 후반 CG 작업과 배우의 연기가 따로 놀지 않도록, 철저하게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전했다.


CG와 VFX 기술은 이제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영화 제작의 필수 도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과도한 CG 의존은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2021년 방영된 tvN ‘지리산’은 전지현, 주지훈 주연에 김은희 작가까지 참여해 큰 기대를 모았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굴러떨어지는 바위, 인물 뒤로 펼쳐진 지리산 배경, 불어난 계곡물 등 주요 장면에서 CG의 어색함이 도드라지면서,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성공적인 사례로는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미술감독과 제작진이 세트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여, 실제 크기의 게임 공간을 정교하게 구현했다. 달고나, 구슬치기, 줄다리기 게임장은 모두 배우들의 동선과 감정을 고려해 실물 세트로 제작됐고, 특히 징검다리 게임장과 배경 벽 등 일부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보완했지만,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세트와 CG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시청자들은 화면 너머의 인공적인 요소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높은 몰입감을 경험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CG, VFX, AI 기술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다만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작비가 적은 현장에서는 AI로 콘셉트 아트를 그리거나 배경 디자인을 대신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김지아 미술감독은 “AI 도구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결과물에 영혼이 담겨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결국 사람이 의도를 갖고 완성해야 관객도 그 안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전엔 우주센터 배경이나 와인 회사 내부처럼 세부 설정을 위해 일일이 자료를 찾았지만, 이제는 AI로 몇 분 만에 이미지를 얻는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최종 결과물은 반드시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와 달리, 제작 환경은 투자 위축으로 점점 열악해지는 것도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한 독립영화 제작사 대표는 “과거 세트 제작에 1억 원 이상을 배정하던 규모에서도 이제는 3,000만 원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다 보니 미술 인력도 절반 이하로 줄고, 콘셉트 아트나 소품 디자인을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과도하게 CG에 의존한 작품은 몰입도가 떨어지고, 반대로 한정된 공간에서도 치밀한 미술 설계로 관객의 몰입을 끌어낸 작품들이 오히려 흥행에 성공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도 많다”고 덧붙였다.


현장의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은 미술팀 내부에서도 디자이너 업무의 세분화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모든 인력이 현장에 상주할 필요 없이, 콘셉트 개발·세트 디자인·소품 디자인 등을 전문화해 단계적으로 투입하면, 한정된 예산 안에서도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며, 이는 AI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김지아 감독 역시 “콘셉트를 잘 잡고 로케이션을 제대로 활용하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밀도 있는 미술적 완성도를 만들 수 있다”며 “로케이션도 미술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술이 발전하면서 물리적 세트가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감정을 설계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감정이 빠진 공간은 결국 관객의 몰입을 끌어내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영화계는 지금, 기술적 효율과 영화적 리얼리티라는 두 가치의 균형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명분 아래 세트와 미술의 가치가 점점 축소되고 있지만, 관객의 눈은 오히려 더 예리해지고 있다. 사람이 직접 설계하고 완성한 장면들이 오히려 더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현장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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