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프다!' 자유 찾아 떠난 안현수, 그리고 빅토르 최

데일리안 스포츠 = 이충민 객원기자

입력 2014.01.24 17:01  수정 2014.01.24 17:51

러시아명 ‘빅토르안’ 뒤에 숨겨진 사연

조국 떠나 날개 편 안현수, 전설 쓸까

안현수의 러시아명 빅토르는 러시아의 전설적 록가수 빅토르 최에게서 따온 것이다. ⓒ 연합뉴스

“빅토르 최처럼 되고 싶다.”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간판스타 안현수(28)가 한 말이다.

안현수는 러시아명을 ‘빅토르 안’으로 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승리를 뜻하는 영어 ‘빅토리’와 발음이 유사하고, 러시아에서 전설이 된 고 빅토르 최를 기리기 위해서다”고 밝힌 바 있다.

안현수가 언급한 빅토르 최(1962~1990)는 구소련(이하 러시아) 시절 국민 록 가수다. 지난 1990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그는 ‘자유’를 갈망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문화대통령이었다.

한국인 2세와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안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 빅토르 최는 세기의 천재였다.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글재주도 뛰어났다. 1982년 키노라는 록그룹을 결성, 신이 준 재능을 음악에 쏟아 부었다. 전설이 된 곡 ‘혈액형’을 비롯해 발표한 앨범마다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록은 악마의 속삭임”이라던 러시아 고위층의 탄압 속에서도 빅토르 최는 굳세게 자신의 록을 이야기했다. 1970~80년대 함부로 내뱉었다간 목숨이 위험한 공산주의 체제 모순까지 가사에 담아 ‘제약 없는’ 예술 활동을 요구했다.

철학적이고 의미심장한 가사에 매료된 러시아 젊은이들이 빅토르 최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거리엔 인종차별 스킨 헤드족이 활개를 쳤지만, 그들조차 ‘고려인 3세’ 빅토르 최에 경의를 표했다. 덕분에 러시아에서 구박받던 ‘고려 한국 피’들을 깔보던 시선도 많이 줄었다. 러시아 한류의 시초였던 셈이다.

그러나 빅토르 최는 1990년 8월 15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러시아 전역 수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울분을 토했다. 앳된 10대 여학생 5명은 일주일 간격으로 “빅토르 최와 하늘에서 교감을 나누겠다”며 아파트에서 몸을 내던졌다.

러시아에서 빅토르 최의 존엄과 명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비극’이다. 모스크바 예술광장 아르바트에는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빅토르 최 ‘추모의 벽’도 있다.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선 ‘통곡의 벽’으로 불린다. 통곡의 벽 근처에 텐트를 친 채 고인의 넋을 기리는 팬들이 아직도 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남미, 유럽 팬도 정기적으로 빅토르 최 추모의 벽을 찾는다. 러시아 음반 협회는 빅토르 최를 사후인 1993년 명예의 전당에 올려놨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지난 2002년 빅토르 최의 업적을 기려 추모의 벽 앞에 ‘석조 비’를 세워줬다. 석조 비는 그해 6월 21일 빅토르 최 생일에 전 세계에 공개됐다.

생전 빅토르 최의 이념을 보면서 ‘빅토르 안’ 안현수의 소박한 꿈이 떠오른다. 구소련 시절 검열 없는 자유 음악을 외친 빅토르 최처럼, 안현수 또한 ‘자신의 전부’인 쇼트트랙의 자유를 갈구했기 때문이다.

안현수는 한국에서 고질적인 파벌로 인해 좌절을 맛봤다. ‘세기의 재능’이 국내대회에선 눈치를 보며 스케이트 탔다. 2006 토리노 올림픽 3관왕은 ‘절정의 시기’인 2010 밴쿠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주위의 치기어린 시샘에 치명적 부상까지 덮쳐 안현수는 통곡했다.

다행히 러시아 빙상연맹이 안현수의 먹먹한 가슴을 두드려줬다. 모스크바 실업팀과 연계해 소속팀 없는 딱한 처지인 안현수를 데려갔다. 안현수에겐 록가수 빅토르 최의 신 조국 ‘개혁 러시아’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에서 주변 눈치 볼 필요 없이 쇼트트랙만 열중할 수 있다는 ‘소박한 현실’에 감사했다.

안현수가 러시아 대표가 되자, 국내 빙상계는 뒤늦은 통탄뿐이다. 한국 국민은 여전히 안현수 편이다. 살아가면서 한 번 이상 인맥과 파벌에 쓴잔을 마셨기에 안현수를 보며 쾌감을 맛보는 한편, '국부 유출'이라는 비통한 심정도 감추지 못했다. 웃프다(웃고 있지만 슬프다)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던 안현수는 러시아에서 분야는 다르지만, 불멸의 록가수 빅토르 최 업적을 품고 질주할 예정이다. 러시아 빙상연맹은 빅토르 최를 존경해 빅토르 안으로 개명한 안현수에 대해 “빅토르 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며 “러시아 동료 모두가 그를 우러러 본다. 빅토르 안은 러시아 대표팀 실질적 리더”라고 극찬했다. 러시아 현지 빙상 팬들도 안현수를 “쇼트트랙의 천하무적 김연아”로 묘사하며 귀화를 반겼다.

안현수는 최근 끝난 유럽선수권에서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4관왕에 등극했다. 올림픽 개막을 2주 앞두고 러시아에 금메달 4개를 안기자 ‘불곰’ 푸틴 대통령도 포효했다.

푸틴은 소치올림픽에 무려 ‘53조원’의 국가 예산을 쏟아 부었다. 역대 올림픽 최대 규모다. 푸틴은 직접 각 종목에 배분하면서 “조국의 위신이 걸린 대회”라고 수십 차례 강조해왔다. 러시아는 1998년 재정 악화 이후 여전히 정세가 불안정하다. 푸틴은 올림픽 성공개최를 통해 국민 사기를 북돋아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심산이다. 그 중심에 ‘빅토르 안’ 안현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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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민 기자 (robingibb@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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