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이분법'도 '무조건 대통합'도 다 문제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5.12.19 10:23  수정 2015.12.19 10:24

<자유경제스쿨>단순계적 사고에서 나온 그릇된 분별과 인위적 통합의 폐해

선-악(善-惡), 정-사(正-邪), 호-오(好-惡), 고-락(苦-樂) 등의 잣대로 세상의 돌아가는 상황을, 특정 사람을, 특정한 문제와 사태를 편 가르는 것은 인간사에서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그릇된 이분법은 일반 국민들이나 감수성이 강한 어린 학생들을 사태의 본질이나 세상의 실상을 왜곡시켜 개인과 사회를 불행하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일체의 분별을 악덕으로 보고 획일적인 통합을 주장하는 경우도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단순계 사고 틀 속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 예는 많다. 제6공화국 초 세입자 보호 명분에서 예외가 없는 한 임차기간을 2년으로 늘린 국회입법은 세입자의 전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려놓았다. 급기야 자살하는 세입자가 속출하였다. 가진 자들에 대한 재산세 중과세로 중소형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부족하고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이 급증하는 전세대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모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단순 구분이 초래한 불행한 결과이다.

당초 분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개인이나 사회가 노력한 정도나 공과에 따라 차등을 두는 변별은 개인이나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이를 두고 ‘차별’이라고 치부하고 일체의 분별과 구분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문명 퇴행으로 이어진다. (‘분별’, ‘변별’, ‘차별’을 가리키는 영어가 모두 ‘discrimination’이라는 데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만큼 분별은 인륜에도 매우 중요하다. ‘분별하지 말고 만인을 사랑하라’고 해서 누구와도 똑같은 애 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사상사적 측면에서 일체의 인위적 분별을 악한 것으로 보고 일체의 분별(이 경우‘차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을 없애자는 주장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루소의 ‘일반의지’에 따른 ‘박애’ 정신이나 墨家의 兼愛思想이 그것이다. 이들은 ‘분별’을 지양한다는 점에서 보면 소극성(negativeness)을 추구하지만, 분별을 인위적으로 없앤다는 점에서 적극성(positiveness)을 추구한다. 특히 ‘제도’를 부정하는 낭만주의자와 진보사상가들은 인위적인 것이 나쁘다고 하면서 또 다른 인위적인 作爲를 시도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해악의 정점에 서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분별은 타도해야 할 악이다. 교육 또는 교육학에서 ‘통합’이라는 말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정당명 중 ‘통합’을 사용하는 정당도 대개 ‘진보’ 정당이다.) 교육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합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⑴ 교과통합 ⑵ 장애통합 ⑶ 능력별 차이통합 ⑷ 계층 간 통합 ⑸ 성별 통합

여기에서 ⑴은 ‘발견학습’이니 아동의 ‘흥미’를 존중한다고 하는 진보교육 또는 아동중심교육에서 기존의 교과를 없애자는 주장이다. 현행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다. 이 주장은 교과의 논리적 특성이나 가치에 아이들을 묶어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과를 가르치지(instruct) 말고 아이들을 ‘돌보아야(care)’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교과 말고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도무지 수긍하기 어렵다.

⑵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인권과 복지 차원에서 하등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장애통합이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한 학급에 놓고 가르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현장 교사들의 애로는 이미 묵살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애로를 토로하는 것은 그 교사가 사회적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다.

⑶의 능력별 통합과 ⑷의 계층 간 통합의 대표적 교육정책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비롯하여 각종 평준화 정책이다. 이에 관하여는 필자가 이미 평준화 정책이 교육 萬惡의 근원이라는 점을 역설하였으므로, 여기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관심 있는 독자는 졸저 《蠱惑 平準化 解剖》를 참고하기 바란다. 어느 경우이건 간에 능력 차이를 통합한다는 발상이 과연 타당한 恒眞인지 잘 따져보아야 한다.

⑸의 성별 통합은 좌파 교육정책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남녀공학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남녀공학이 양성 간의 이해를 증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획일적인 평등주의이거나 양성 간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교육상황을 포함하여 분별이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경우는 공사(公私) 구분의 잘못 적용에서 찾을 수 있다. 언론매체가 전달하는 정보나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을 보면 공히 ‘공교육’은 지향해야 할 선이고 ‘사교육’은 지양해야 할 악으로 자리 잡았다. 교육의 역사는 사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교육받은 사람의 재능이 사유재라는 엄연한 사실은 묵살된 지 오래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사유재산이 우습게 여겨지는 풍습은 공-사의 그릇된 이분법에 기초해 있다.

무분별한 분별의 해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개인-사회의 구분이다. 한 마디로 개인은 나쁘고 공동체 가치는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개인과 사회는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사회는 개인이 만들었지만, 개인에게 영향을 준다.

이를테면 어느 대형서점 앞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을 형성하는 별도의 작용인(作用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책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이 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회 혁신을 주도하는 주체가 개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면 개인은 ‘공동체’라고 포장된 집합적 가치에 함몰된다. 전체주의를 몰고 오는 전조(前兆)가 된다.

낭만주의자들이 문명을 ‘자연의 적’으로 보는 논거에 기초한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문명-자연의 단순 이분법에 따른 것이다. 역설은 여기서도 성립한다. ‘문명은 자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산물이지만, 그 문명은 자연을 바꾸어놓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단순계적 사고에서 비롯된 그릇된 이분법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족: 필자가 이 글에서 단순계적 사고에서 나온 그릇된 분별과 인위적 통합의 폐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지식기반사회 패러다임에서 중시하는 융합(fusion)이나 하이브리드(hybrid) 가능성을 배제하자는 말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융합이나 하이브리드는 세련된 의식의 분화(즉, 分別智)의 산물에 가깝고, 획일적인 인위적 통합과는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다.)

글/김정래 부산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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