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발전소 소장 평섭 역 "원전 소재에 끌려 대본 받자마자 출연 결심"
"'판도라'는 제 인생의 영화예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입니다."
7일 개봉한 국내 최초 원전 블록버스터 '판도라'(감독 박정우)에 출연한 정진영은 영화를 이같이 소개했다. 영화는 13일까지 관객 160만명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다.
정진영은 극 중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발전소 소장 평섭 역을 맡았다. 평섭은 배경 설명이 없는 캐릭터다. 자기 위치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어떻게 보면 평면적인 인물이다.
13일 서울 소격동 카페에서 만난 정진영은 "평소에 깊고 복잡한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이번 평섭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라며 "영화에서 그 인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재난에 맞서싸우는 평섭의 헌신적인 모습에 끌렸다"고 했다.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작 기간만 총 4년인 이 영화는 민감한 소재와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안일한 모습을 담은 탓에 외압 의혹에 시달렸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를 본 정진영은 "개봉 후 입소문이 나는 것 같다"고 웃은 뒤 "후반 작업에 시간이 걸리면서 개봉이 늦어졌는데 주변에서 개봉할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배우 정진영이 출연한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뉴
정진영은 영화 개봉 전 열린 제작보고회 때 '판도라'가 인생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시나리오를 읽고 '짜릿'했어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싶었어요. 메시지도 있어야 하고 규모가 커야 했거든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하겠다고 했습니다. 원전 소재로 한 영화는 처음인데 진지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환경운동단체가 원전의 심각성을 알리긴 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논의가 되진 않았거든요. 영화를 통해 원전을 언급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일 거라고 판단했죠."
배우는 캐릭터에 뛰어들기 전 원전에 대한 조사나 공부도 했다. 그는 "이 영화의 취지에 공감하려면 기본적인 교육은 필수"라며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배우들끼리 서로 격려하면서 촬영했다"고 고백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판도라'를 통해 원전의 심각성에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배우는 "아들이 초등학생 때 장래희망이 원자핵 물리학자여서 나도 (관련 지식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웃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환경 운동이 막 시작될 즈음이었지요. 원전에 대해선 깊게 생각 못 하다가 아들을 통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지요. 근데 아들 꿈이 이젠 바뀌었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앞서 박 감독은 인터뷰에서 배우, 제작진과 약속한 게 있다고 밝혔다. '비껴가거나, 피해가거나,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말자'고. 현장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궁금했다. "감독님 결의가 큰 듯합니다. 영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배우들은 '판도라'가 논쟁적인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재난 영화의 촬영장은 '재난' 그 자체였다. "건물 잔해들, 분진 등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차는 뒤집어져 있고(웃음)."
배우 정진영은 "영화 '판도라'를 통해 원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뉴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한여름에 방재복 입고 헬멧 쓰고 뛰어다니는 게 힘들었다"며 "촬영 중에 숨이 막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박 감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대사와 장면을 걸러내기도 했다. 우유부단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막강한 권력을 쥔 총리에게 "도대체 이 나라는 누가 이끌어 갑니까?"라고 외친 부분, 재난 상황실에서 총리가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은 판단 능력을 상실했습니다"라고 한 부분 등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재혁과 구조팀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 재혁이 대통령에게 "쇼하고 있네. 이게 나라입니까. 죽어서도 지켜볼 겁니다"라고 외친 대목 등도 잘라냈다.
정진영은 "편집은 감독의 영역이라 아쉽지 않다"며 "시국이 이렇게 되면서 현실과 맞닿은 장면을 뺐다고 들었는데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판도라'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맞물려 개봉하는 점은 화제가 됐다. 제작보고회, 시사회에서 감독과 배우들은 시국 비판을 이어가기도 했다. 박 감독은 "시국과 맞물려서 개봉하는 게 득일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다"며 "4년 동안 피땀 흘려 내놓은 결실이 현실에 묻히는 듯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평소 소신 발언을 하기로 유명한 정진영의 생각을 물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시국에 쏠려있어서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듯해요. 이런 상황이 닥칠지 누가 예상했겠어요? 픽션이 현실로 다가오니깐 겁이 나더라고요. 큰 재난이 닥치기 전에 대비하자는 건데 재난이 현실이 되면서 두려운 거죠. '판도라'는 원전 문제를 고민해보자고 내놓은 영화입니다. 원전 사고는 큰 재앙입니다. 관심을 갖고 꼭 점검해야 합니다."
배우 정진영은 영화 '판도라'에서 발전소 소장 평섭 역을 맡아 김남길과 호흡했다.ⓒ뉴
정진영은 제작보고회에서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내가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투자한 투자자가 있을까 걱정했을 뿐이다. 창작자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떠올리는 사회는 못돼먹은, 불행한 사회다. 표현이 자유가 있어야 민주주의 국가"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전 사실을 얘기했어요. 최근에 이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겁니다."
'판도라'에 나온 정부의 모습은 현실과 너무 닮아 우울하기도 하다. 통쾌한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배우는 "현실이 이러니깐 우울해 한다"며 "원전 문제를 따져 보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전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안전망에 대해 염려하는 상황을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으로는 마지막에 재혁이 죽기 싫다고 오열하는 장면을 꼽았다. "재혁이네 삶이 기구하잖아요. 눈물을 참을 수 있겠어요? 어려운 신이라 남길 씨가 걱정했는데 잘 해줬어요. 한쪽에서는 신파라는 지적이 일긴 하지만 영화라는 게 보는 분들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는 거니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재난 영화 특유의 긴박감, 스펙터클 등이 잘 살아난 것 같아요."
극 중 재혁은 이런 얘기를 한다. "재앙 속에 있는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무섭다고 눈 감지 말고, 겁먹었다고 숨지 말라"고. '판도라'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절망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이다. 정진영도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했다. "문제없는 사회, 집단은 없어요.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희망이 생깁니다. 불행과 좌절이 있다면 희망도 반드시 있다고 믿어요."
정진영은 또 "'판도라'가 원전 소재 영화로 자리매김한 것 같은데 그걸 뛰어넘어 장르 영화로서의 만듦새도 부족하지 않다"며 "주변에서 '볼 만하다'는 얘기를 듣고 관객들이 극장에 오셨으면 한다"고 미소 지었다.
배우 정진영은 "영화'판도라'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라고 했다.ⓒ뉴
1988년 연극 '대결'로 데뷔한 정진영은 '약속'(1998), '킬러들의 수다'(2001), '달마야 놀자'(2001),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즐거운 인생'(2007), '브레인'(2011), '찌라시: 위험한 소문'(2013), '국제시장'(2014), '화려한 유혹'(2015) 등 40여편에 출연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뜯어보면 앞에 나서는 역할보다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역할이 더 많다. 공격보다 수비인 편이다. 그는 "내 성격이 그렇기도 하고, 그런 역할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며 "배우마다 주 포지션이 생기는데 난 판을 벌이고 중심을 잡아주는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고 설명했다. "도드라지거나 앞장서는 역할을 무조건 맡고 싶진 않아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게 돼서 더 좋아요. 그런 감정을 알 만한 나이가 된 거죠."
강직하고 차분한 이 배우는 평소에 조용히 사는 걸 선호하고 긍정적인 편이라고 했다.
'연출부'를 꿈꾸던 정진영은 시나리오 작업도 구상한 적 있다. 나를 위한 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그는 사람들의 복잡한 감정에 흥미를 느낀단다. 인간이란 하나의 생각으로만 사는 것 같진 않다는 이유에서다.
평소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물었더니 성향이 드러나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끄러운 건 안 봐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건 안 봅니다. 허허."
정진영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했다. 향후 시사 교양프로그램 MC로 나설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너무 무거워요. 근데 요새 지상파 시사 교양프로그램이 다 사라졌죠? 언젠가는 다시 생기겠죠. 필요한 프로그램이니깐. 전 조용히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건 할 수 있답니다(웃음)."
딱딱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거친 그는 tvN 인문학 토크쇼 '동네의 사생활'에 출연 중이다. 우리 동네, 즉 평범한 공간에 얽힌 인문학 이야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배우는 일단 "재밌다"고 했다. "화제성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은 아니에요. 나름대로 색깔을 지키면서 천천히 가다 보면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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