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 두고 ‘분별없는 처사’라니
서훈 전 실장이 무슨 공을 세웠기에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 감당해야
문재인 전 대통령이 1일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을 통해 ‘입장문’이라는 것을 내놨다. 검찰이 지난달 29일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이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대통령으로서 국방부 해경 국정원 등의 보고를 직접 듣고 그 보고를 최종 승인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해당) 부처의 판단이 번복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검찰수사 두고 ‘분별없는 처사’라니
이게 전직 대통령으로서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인지, 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전 대통령이 후임 정부의 검찰권 행사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법치의 부정이나 다를 바 없다. 아마도 검찰 수사의 창끝이 결국은 자신에게 이를 것이라는 예상 때문일 듯하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맥락을 잘못 짚었다. 이는 ‘안보사안’이 아니다. 해수부 공무원이었던 우리 국민 한 사람이 북한 해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운동을 벌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전직 대통령이 ‘안보’를 면책 핑계로 내세우는 게 황당하다.
그는 ‘분별없는 처사’라는 표현으로 현 정부 검찰을 매도하길 서슴지 않았다. ‘도’를 넘지 말라는 것은 명백한 협박이다. 어떤 ‘도’가 있기에 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것인가. 구속영장은 검찰이 발부하고 집행하는 게 아니라 법원에 청구하는 것이다. 법원에서 기각하면 검찰은 구속할 수가 없다. 구속영장 청구 그 자체가 이미 ‘도’를 넘었다는 뜻으로 한 말인가.
‘오랜 세월 국가안보에 헌신해온 공직자들의 자부심을 짓밟으며, 안보체계를 무력화’하는 처사라고 일갈했는데,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에겐 면책특권이 부여돼 있다는 뜻인지 의아하다. (자신은 보고받은 내용을 승인만 해줬을 뿐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하는 의도는 또 뭔가. ‘설령 그들의 보고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나는 책임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닌가?) 피살 공무원 이대준 씨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수사다. 정부 당국자들이 아무런 구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고, 피살 이후엔 책임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에 작당을 했는지 파악해 보겠다는 것 아닌가.
재임 중 유난히 김정은과의 화친에 공을 들였던 문 전 대통령이다. 김정은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하겠다는 결의가 그의 대북행보에 그대로 묻어 났었다. 김정은의 어린 여동생으로부터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로 지칭되면서도 그쪽을 향해서는 웃기만 했다. 개성에 우리 돈으로 세웠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김여정이 폭파시켰을 때도 남북군사합의 파기가 아니라고 문 정부는 우겼다. 그런데 이 씨 피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일이 ‘안보체계를 무력화하는 분별없는 처사’라고 한다. 문 전 대통령이 ‘안보’를 방패로 삼다니!
서훈 전 실장이 무슨 공을 세웠기에
그의 분개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서 전 실장은 3일 구속 수감됐다. 그러자 문 전 대통령은 4일 페이스북을 통해 서 전 실장을 한껏 띄우며 유감을 표했다.
법원을 상대로는 ‘분별없는 처사’라고 경고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듯 서 전 실장 추어올리기로 반발의 방향을 바꾼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과를 먼저 소개해 줄 일이다. 그리고 그의 결백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줘야 옳다. 그게 ‘최종 승인자’로서의 당연한 도리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북한에 멸시·배제·조롱당하면서 핵무기 및 미사일 성능 개선의 시간만 벌어준 시기와 그의 국정원장·국가안보실장 재임기가 겹친다. 그러니까 김정은의 오만을 극대화하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여지없이 떨어뜨린 게 그의 능력이었다는 것인가.
서 전 실장과 같은 ‘신뢰의 자산’은 다시 찾기 어렵다고 했던데, 누구와의 무슨 신뢰를 말하는가? 북한으로부터의 신뢰라면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된다. 그 무신(無信)의 집단에게서 받은 신뢰는 우리 국익이나 안보에 도움이 되는 경력이었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서 전 실장은 1997년부터 2년간 북한 신포 경수로 건설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 당시 북한 금호사무소 현장사무소장으로 그곳에 상주했었다. 그 때의 경력으로 이후 국정원의 북한 전문가·전략가·협상가로서의 이력을 쌓았다고 알려졌다. 문득 북한이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문 정부의 대북정책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을 ‘다시 찾아야 할’ 일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 감당해야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서 전 실장만큼 남북 실무와 정책,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분이 없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필요한 분”이라며 “보석, 불구속 기소로 사법부 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윤 대통령의 용단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 전 실장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거들만한 입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 전 원장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베이징 비밀접촉을 가졌을 때 서 전 실장이 수행했었다. 서 전 실장은 이를 계기로 대북 협상가 이력을 쌓았다.게다가 문 정부에서 대북 안보정책 투톱의 역할을 함께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도 박 전 원장의 처지 또한 만만찮다. 남 역성들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문 정권의 실세로 위세가 대단했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도 한마디 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집권이 기정사실화됐을 때, 그리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직전 정부는 물론 그 이전 정부까지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잊어버린 양해서는 안 된다. 그 정부들의 대통령부터 측근 인사들까지 줄줄이 법정에 세워져 온갖 망신을 다 당한 다음 교도소로 끌려갔다. 문 전 대통령이나 이재명 대표가 이끌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를 비난하는 논리를 빌리면 그 일 또한 문재인 정부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었다.
세월은 가게 마련이고 처지도 언젠가는 바뀐다는 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하고 이제 와서 온갖 궤변으로 ‘사법 억지’를 부린다는 것인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뿐만 아니다. 문 전 대통령이든, 이 민주당 대표든, 민주당의 유력자들이든, 잘못이 있었다면 사법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러는 게 법치의 의의다. 문 정권과 민주당 유력자들의 전비(前非)를 덮고 넘어가자는 것이야 말로 민주주의를 관에 넣어 못질해 버리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민주·법치체제는 수호돼야 한다. 법이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며 대들든!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