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여야 모두 불완전 출발"
"누더기 보수 상대로 민주당 반사이익"
"정치가 '잘 반대하는' 방향으로 최적화"
"담론 형성 못하고 진영 대립으로 귀결"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말해 큰 파장을 일으켰던 1995년 '베이징 발언'으로부터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 정치는 4류에서 조금이라도 랭크가 올랐을까. '헌정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21대 국회의 모습을 보며, 일말의 기대마저 내려놓는다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과연 우리 정치, 우리 국회, 우리 정당은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4류 정치'를 청산하고 선진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데일리안은 '4류정치 청산'을 주제로 하는 연속 인터뷰를 통해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세 번째 순서로 김재섭 국민의힘 서울 도봉갑 당협위원장을 만났다. 김 위원장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1987년생 '30대 청년 정치인'으로 지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비대위원으로 활약했었다.
Q. 국회가 끝날 때에는 "이번 국회가 역대 최악이었다"는 평가가 클리셰처럼 나온다. 하지만 이번 21대 국회는 정말 '역대 최악'이라는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정말 최악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게 21대 국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미래통합당은 탄핵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봉합하고 땜질한 누더기 상태였다.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한 옷가게에 들어가 명함을 드렸더니 '탄핵 정당이 무슨 낯으로 선거를 하느냐'며 명함을 던져버리시더라. 그만큼 국민의힘은 불완전하게 21대 국회를 시작했다."
Q. 복기해 보면 좌우를 떠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선거 자체가 집권세력이 유리했고 재난지원금 등의 영향도 있었다.
"물론 코로나나 일부 후보의 망언과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부차적이다. 150석 얻어야 할 정당이 100석이 된 이유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국민 정서가 깊게 깔려있었던 것이고, 탄핵 이슈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했던 게 결정적이다. 5·18 망언, 황교안 전 대표의 실언, 광화문 집회 등 극우화 경향을 보인 자유한국당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간판만 바뀌어서 도전한 결과다.
더불어민주당은 다 죽어가는 국민의힘을 때려서 180석을 얻었는데 그러한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된 게 아니다. 우리 당은 심판을 받았고, 민주당은 과도한 반사이익을 얻은, 양당 모두 불안정한 상황에서 의석 수만 이상하게 배분돼 시작부터 꼬인 거다. 총선 후 원내가 구성되면 다수당은 책임을, 100석 야당은 야성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둘 다 없었다."
Q. 21대 원구성부터 나쁜 측면에서 파격적이었다. 일당의 상임위 독식이라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비대위에 있을 때였는데,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도저히 못 주겠다고 하더라. 법사위는 통상 야당 혹은 원내 2당이 가져갔다. 다른 상임위를 가져온다고 해서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다 가져가라고 했다. 민주당의 폭주를 지켜본 국민들이 서울시장 재보선 때 오세훈 시장을 만들었고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21대 국회는 상대방의 못난 면을 반사작용 삼아 그때그때 해온 것이다. 자생적 경쟁력이 아닌 반사이익을 얻는 형태가 고착되다 보니 전반적으로 후질 수밖에 없다."
Q. 민주당의 국정운영 함량 미달이 드러날 것이라고, 반사이익을 노려 다 넘겼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국정을 견제해야 할 야당으로서 무책임했고, 민주당의 독주로 인한 국민적 피해를 방기한 게 아닌가. 4류 정치의 한 단면이 아닌가.
"법사위를 놓치는 것은 다른 상임위와는 다르다. 법사위원장이 민주당이면 우리가 다른 상임위원장을 가져와서 퍼포먼스를 보였더라도 다 막혔을 것이다. 당 전체적으로도 크게 이득이 될 게 없다. 단면으로 봐서는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민주당에 대한 국민적 심판을 받게 해 다시 정상화 과정을 밟는 것도 정치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Q. 문재인 정부 5년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인상, 공공일자리 등 좌파가 밀던 어젠다는 다해봤고 다 실패했다. 지금은 다 소진해 공백 상태다. 그래서 국민들이 보수를 봤는데 법치주의 외에 딱히 보이는 어젠다가 없다. 반사이익도 제대로 못 누리는 것 같은데.
"예전에 '바뀌지 않으려면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의 보수정당에게 딱 맞는 얘기처럼 들렸다. 유럽의 경우 보수 세력이 환경과 젠더, 가족 형태 등 전통적 보수 담론이 아니었던 것들을 먼저 다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보수는 여전히 반공과 시장자유주의에서 한 스탭이라도 더 전진했는지 의문이다.
국민 눈높이에서 민주당은 하고 싶은 거 했다가 실패하고, 국민의힘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세련된 보수정당의 어젠다를 던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당장 닥친 현안을 담론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상대가 하는 것은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식이다.
일례로 양곡관리법이나 간호법에 대해 국민 80%를 제대로 된 내용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양당은 마치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싸우고 담론을 진영대립으로 귀결시킨다. 반사작용으로 집권 혹은 의석 수를 확보해왔기에 상대를 반대하는 것에 정치가 최적화됐고, 21대 국회가 최악이 된 이유다. 각 정당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시작이다."
"각 정당 모두 아이덴티티 정의 못해"
"'상대방 반대'와 팬덤으로 자기 규정"
"당 내 다양성 확보돼야 국민 지지"
"'이준석 실패'에서 보완점 찾아야"
Q.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보면 많은 후보들이 '야당과 잘 싸울 인물' '최전방 공격수' 등을 내세웠다. 싸우는 건 좋은데 무엇을 위해 싸우겠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
"현실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인데, 지금의 양당 정치인들은 제도화된 유튜버 느낌이다. 유튜브는 흑색 아니면 백색이다. '문재인 감방 대 윤석열 퇴진' 사이에 중간은 없고, 주먹 쥐고 싸우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문제는 전체 여론으로 착각할 수 있는 유튜버·팬덤 덩어리들이 정당에 쏟는 힘이 강해 정당이 거역하거나 타협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유튜버보다 세련되게 '문재인 감옥,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이 주목받고 타협을 하려거나 접점을 찾는 사람들이 나쁜 놈이 돼버린다. 그러니 21대 국회 내내 진영 대립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Q. 현 정치의 최대 화두를 꺼낸 것 같다. 그런데 유튜브 같은 SNS에 기반한 정치 양극화는 우리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고 세계적인 흐름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방치할 순 없고 우리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너무 어려운 문제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결국 원칙으로 가야 한다. 정치인 개개인이 유튜브 여론이나 극단적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게 정답이다. 그러려면 물론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미국과 중남미는 비슷한 헌법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운용하는 사람에 의해 결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정치의 개념 아래서 합법과 불법 사이 넓은 공간을 정치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정치인들 개개인이 절제하고 변해야 한다. 지금은 반사이익만 노리는 정치를 하다 보니 공격하고 앙갚음하며 불법과 합법 경계 끝까지 서로 가려고 하는 것 같다. 법원에서 가서 죄를 따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가장 후진적 정치의 모습이다."
Q. 보수의 아이덴티티 문제에서 이준석 전 대표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0선 30대 제1야당 대표라는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될 수 있는 대표를 보수정당이 내놨다. 반사이익을 노린 게 아닌 경쟁력 확보를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실패했다.
"이 전 대표를 지지하는 확고한 지지층과, 못 미덥지만 힘을 실어주자는 분들이 함께 어우러져 당선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전 대표를 느슨하게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 지향점에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싸울 땐 싸우고 화해할 땐 화해하는 유연한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 게 안되는 감정적 측면이 있었는데 그런 점이 아쉽다."
Q.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의 전통적 지지층들이 이 전 대표를 더 증오하는 상황이다. 내부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어떻게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나.
"그게 아마 이 전 대표에게 남겨진 가장 큰 당면 과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역시 제일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천하람 위원장이 당의 6070 세대들은 이준석보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강점이 맞다. 반대로 이 전 대표에겐 약점인데 이번 실패를 통해서 잘 보완되면 훌륭한 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Q. 이 전 대표 문제도 핵심은 대통령실과의 갈등이었다. 말한 것처럼 시스템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것이고, 대통령이 자신과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국정운영을 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여당이기 이전에 공당이다. 국회의원은 입법부라는 아이덴티티가 먼저다. 그러면 여당이 정부와 발을 맞춰야 하지만, 또 하자는대로 다 한다면 여당이 아니라 행정부의 산하기관이 된다. 대통령의 뜻을 잘 관철시키고 국정 파트너가 될 사람을 공천한다고 했을 때, 대통령실이 생각하는 파트너가 진짜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는 정당이 훨씬 더 잘 안다.
정당은 민심을 담는 그릇이고, 지역에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정책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이걸 잘 조율하는 사람들이 국정운영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반대로 가면 안 되겠지만, 여당은 대통령실과 민심의 가교로써 잘 된 공천을 하기 위해 다른 목소리를 낼 필요도 있다."
Q. 이 전 대표는 그 선을 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게 아닐까. 일례로 이 전 대표를 지지했던 많은 당원들이 이번 전당대회 때에는 천·아·용·인(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정치인은 선거 결과로 말하는 것이니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를 실패로 두고 접어야 하나. 나중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는 이준석과 천·아·용·인의 퍼포먼스로 평가될 것이고, 정당 입장에서 이러한 실패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Q. 이준석계라 더 강하게 비판을 못하는 거 아닌가(웃음)
"솔직히 이 전 대표 이야기는 저에게 항상 어렵다. 양가적인 감정이 있다. 이 전 대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비판도 내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말로 대신하겠다."(웃음)
Q. 끝으로 정치가 4류를 벗어나려면 제도든 문화든 사람이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하나만 꼽으라면 극단적 강성 팬덤에 흔들리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현안과 관련해 말하면 나는 중앙선관위에 대한 감사원의 전면 감사에 반대한다. 물론 특혜 채용과 관련해 감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각 지역의 선관위는 개별 정치인의 활동 내역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이 편제상 대통령 아래인 감사원에 들어갈 경우, 정치인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시점에 야당 입장이 됐을 때에는 굉장히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이준석계라고 비난하고, 새보수 출신이라며 입막음을 하려고 한다. 유튜브에서 진영 논리가 정해지면 단일대오를 요구하고, 이탈하면 내부총질이라며 다른 목소리를 못 나오게 하는 것이다.
보수정당이 가장 건강했을 때를 생각하면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소장파 시대) 때와 같이 여기저기서 다른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경쟁을 할 때였다. 대한민국 발전과 민생을 위해 같은 당일지라도 격렬하게 치고받고 하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지를 할 것이며, 정치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