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후 수년이 지나, 매년 찾은 독일 고위전문가에게 당시의 통일 문제점을 질문했다. 특히 동·서독 주민 간 갈등에 초점을 두면서.
의외로 약간의 핏대를 세우며 “통일 문제, 통일 문제라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그 ‘민주화’되었다는 미국에도 갈등이 없습니까.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이 없습니까. 그것이 쉽게 사라집니까. 우리는 통일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하나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미국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심 가치로 작동하는, 어찌 되었든 그 가치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미국이다. 조건 없는 기여나 자비가 아니라, 철저한 국가이익에 근거한 정치·군사·경제적 세력권 확장이었다 해도.
유학 시절 베를린 자유대학교 필자의 부지도교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기 위해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잠시 출타 중인 그를 기다리다 넓은 탁자 위 높이 쌓인 서류들에 자연 눈길이 갔다.
한국의 종교·사회단체들이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에 지원을 요청하는 자료, 청원서들이었다. 독일에 보낸 것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나라들 특히 미국에는 얼마나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닉슨 독트린과 닉슨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 1969~1973”을 썼다. 닉슨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진해 온 외교·안보 및 대외경제정책을 하루아침에 바꾼 원인을 정치·경제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전쟁 이후 미·소가 세계 지도를 다시 그어 재편한 가운데, 세력권을 유지·확산하고 그 맹주가 되기 위해 미국은 세력권 내 국가들에게 자유무역주의를 기치로 시장을 개방했다. 닉슨은 ‘신경제정책’이란 이름 아래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섰다.
세력권 내 국가들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아들인 것은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 이른바 ‘브레턴우즈 체제’였다. 닉슨은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타국과 상의 없는 미국의 ‘경제적 일방주의’였다.
더 큰 충격은 외교·안보 정책의 급변이었다. 냉전 속에서 소련·중국과 대립했던 미국이 자유세계와 상의 없이 소련·중국과 손잡은 것이다. 이른바 ‘데탕트’, 긴장 완화의 시작이다.
자유 진영의 최전방 전진기지로서 총대를 메었던 한국과 서독에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머리 위를 지나 중국·소련과 악수한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지각변동과 같았다. 이미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닉슨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게 핵 공격 이외에는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방위는 당사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데탕트와 더불어 미국의 ‘외교·안보적 일방주의’였다.
당시가 어떤 상황이었는가. 미국과 함께, 미국을 대신해 우리는 최정예 부대를 월남에 파병해 피 흘리고 있었다. 1968년 1월 북한이 특수부대 31명을 침투해 청와대를 습격한, 이른바 ‘1·21 사태’가 일어났다. 10월 말에는 울진·삼척 지구에 무장 공비 120명이 침투해 2개월간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피가 채 마르기 전이었다. 더구나 그해 1월 23일에는 미 해군 푸에블로함이 북한에 피랍되고 83명의 승무원들이 포로가 되었다. 미국이 군사적 대응은커녕 북한에 끌려다니다, 12월 영해 침입을 시인·사과하고 승무원 석방 대가까지 지불했다. 그런 상황에서 괌 선언이 나온 것이다.
닉슨의 외교·안보·대외경제정책 격변의 기저에는 추락한 미국 경제가 놓여있었다. 월남전 여파에 더해 서방 주요국들의 경제성장으로 압도적 우월에서 상대적 우월로 약화된 경제력이었다.
미국의 안보 공약을 믿지 못하겠다, 자주국방을 추진해야 한다는 절박한 박정희 대통령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미군 철수, 감축론이 오가고, 우리 자체 핵무장 문제가 불거지고, 한·미 간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와 사정에 큰 차이가 있었지만, 같이 서방 진영 최전방 기지로 역할을 했던 서독의 선택은 달랐다. 분단 기간 내내 지속된, ‘미국 편승 정책’에 입각한 현실적 실익정책 ‘Realpolitik’이 작동했다.
냉전 기간 미국에 밀착해 국가와 군(軍)을 재건하고, 경제지원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서독이다. 소련과 긴장 완화를 추진하는 미국을 설득해 ‘서베를린 문제’, 즉 소련이 서독과 서베를린 간 통행을 단절했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1949년 5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서독과 서베를린 간 연계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의 동의·지원 아래 소련 및 동구권과 관계를 개선하고,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서독은 미·소가 다시 대결한 신냉전 시기에 다시 미국에 밀착해 소련의 SS-20 중거리 핵 탄도탄에 맞서려는 미국의 ‘퍼싱Ⅱ’ 탄도탄의 배치를 받아들였다. 돈독한 독·미 동맹을 바탕으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개월 만에 서독은 통일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보했고, 미국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트럼프 1기에 경험했던 일방적 미국주의가 집권 2기에 더욱 거세고 거침이 없다. 외교·안보·대외경제 전반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국가 안보는 물론이고 성장에 미국의 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긴요하다.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도 미국과 공유한다.
만일 우리나라가 다시 독재체제가 되었다고 가정해도,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중국에, 러시아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의미가 있을까.
헌법에 입각한 ‘자유민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는데 누가 제일 도움이 될 것인가. 미국의 지지 없이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할 수 있을까.
밀어닥친 트럼프 파고에도 ‘편승’해 우리의 국가이익을 구현해 내는 Realpolitik이 절실한 시점이다. 냉정한 판단·전략 아래 대 트럼프 접근, 대미 외교를 펼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은 핵보유국이다, 김정은과 좋은 관계다”를 말하며 김정은과의 대화를 유인하고 있다. 우리가 트럼프와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는 가운데, 김정은이 트럼프에 편승해 실리를 추구하는 Realpolitik을 구사하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
기반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한·미동맹을 존중하는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다.
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