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례를 추적 조사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비동의 성적 촬영물 이용한 범죄)'를 16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은 여성 12명, 방송통신위원회와 여성가족부 등 관련 정부기관 관계자, 민간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2019년부터 약 2년여에 걸친 심층 면담 내용을 담았다.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례
언제부터인가 직장인 이예린(가명·30대)씨에게 유부남 직장 상사가 추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씨는 유부남인 상사에게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상사로부터 탁상형 시계 하나를 선물 받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침실에 뒀다. 그러다 얼마 후 깜빡깜빡 불이 신경 쓰여 시계를 결국 다른 장소로 옮겼다.
그런데 상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시계를 원치 않으면 돌려달라고 이씨에게 요구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이씨는 시계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몰래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탁상시계 안에 숨겨진 카메라가 영상을 찍어 지정된 스마트폰으로 송출하는, 불법촬영(몰카)용 특수시계였던 것. 이씨의 생활은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고 있었다. 더욱 소름 돋는 사실은 카메라를 발견한 다음 날 따지는 이씨에게 상사는 "그거 검색하느라 밤 샜니?"라고 되물은 것.
이씨는 "밤마다 울었다. 잠도 못 자고 진정제를 먹어야 했다"면서 "때로는 아무 일 없는데도 내 방에서 이유 없이 너무 무서울 때가 있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 직장 상사는 징역 10개월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씨의 고통은 언제 멈출 지 모른다.
원인은 '성 불평등 문화'와 '뒤처진 성평등 인식’
헤더 바 HRW 여성권리국 공동소장대행은 한국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유독 많은 이유에 대해 '뿌리 깊은 성 불평등 문화'와 '기술에 비해 한참 뒤처진 성평등 인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그는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설치된 불법 카메라는 다른 국가에서 흔치 않다. 이렇게 촬영된 이미지들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한국의 사례에 집중한 이유"라고 보고서 배경을 설명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뿐만 아니라 수사 및 사법당국의 2차 가해, 가벼운 처벌 등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 검찰, 법원 같은 수사·사법 기관에서 2차 피해를 당했다는 피해자들이 다수이며,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해 검찰로 넘긴 사건 중 절반 가까이는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헤더 바 HRW 여성권리국 공동소장대행은 "대부분의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은 지나치게 낮아 피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며 "피해자들은 사법제도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평생 이 범죄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수사·사법 기관 담당자들에게 디지털 범죄의 심각성과 성인지 감수성, 젠더 폭력의 영향 등에 대해 교육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디지털 성범죄 발생 시 가해자 색출뿐만 아니라 불법촬영물 삭제 등 기술적 지원과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충격을 감안한 정서적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