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통령, 신년 인터뷰 통해 불붙여
과거 우리나라와 일본서 택한 방식
장단점 심층적으로 살펴봤더니…
새해 벽두부터 선거구제 논의가 불붙고 있다. 올해에는 전국 단위 공직선거가 없지만 내년에 4·10 총선이 치러진다. 총선을 한 해 앞두고 '게임의 룰' 논의가 조기 점화된 모습이다.
논의를 촉발시킨 계기는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인터뷰다. 윤 대통령은 신년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보니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지역 특성에 따라 2~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선거제도는 개헌(改憲) 논의 못잖은 폭발성을 가진 정치권의 '블랙홀'이다. 윤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개헌이라는 게 워낙 폭발적이라 지금 개헌 얘기가 나오면 민생과 개혁은 다 묻힐 것"이라고 해놓고서, 정작 다른 '블랙홀'을 열어젖혔다는 게 아이러니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파견된 집권여당 대표까지 참지 못하고 SNS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을 정도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선거제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자격이 있지 않느냐"며 "말그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식 논의의 멍석이 깔린 셈"이라고 바라봤다.
중대선거구제란 하나의 국회의원 지역구에서 두 명 이상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1등만 당선되는 현행 소선거구제와 달리 2등 이하도 당선될 수 있다.
학술적으로는 2~4인을 선출하면 중선거구, 5인 이상을 선출하면 대선거구로 분류하지만, 현실정치에서는 2~6인을 선출하는 선거구가 흩어져있던 과거 일본과 같이 중선거구와 대선거구를 명확히 구분짓기 어려워 일반적으로 '중대선거구제'라 통칭한다.
해외 입법례와 헌정사를 살펴보면 1993년까지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유신 정권 때의 1973년·1978년 총선과 제5공화국 때의 1981년과 1985년 총선, 총 네 차례의 총선이 중대선거구제로 치러졌다.
중대선거구제, '사표 방지'가 최대 장점
60%대서 20% 안팎까지 줄어들 수도
상대 정당 '텃밭'서 당선에 도움될 여지
중대선거구제의 장점으로는 △사표 방지 △지역주의 타파 △양당제에 있어 정당내 다양성 보장 등이 꼽힌다.
2012년 총선 당시 광주 동구의 박주선 무소속 후보는 득표율 31.6%로 당선됐다. 총 4만9239표 중 박 후보를 찍은 1만5372표 외의 3만3867표는 사표(死票)가 됐다. 양형일 무소속 후보(30.6%, 1만4916표)와 이병훈 무소속 후보(18.8%, 9177표)는 적지 않은 표를 받고서도 낙선했다. 만약 3등까지 당선됐다고 가정하면 사표를 전체의 68.4%에서 19.0%까지 드라마틱하게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역주의 타파도 이뤄질 수 있다. 같은해 총선에서 전북 전주을에 출마한 정운천 새누리당 후보는 35.8%(3만406표)를 얻고서도 지금은 영어(囹圄)의 몸이 된 이상직 민주통합당 후보(47.0%)에게 밀려 분루를 삼켰다. 전주에서 28년만에 보수정당 후보로 당선되겠다는 꿈은 2016년 총선까지 4년 더 미뤄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같은해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갑에 출사표를 던진 전재수 민주통합당 후보는 47.6%(3만5069표)를 얻고 박민식 새누리당 후보(52.4%)에게 눌려 낙선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당계 후보로 이 지역구에서 첫 당선되겠다는 꿈 역시 2016년까지 4년 연기됐다.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현재 3개의 소선거구로 돼있는 전주 전체를 3인 중선거구로 개편하거나, 부산 북구·강서구·사상구·사하구를 5인 대선거구로 묶으면 상대 정당의 '텃밭'에서도 국회의원이 배출되면서 지역주의 타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윤 대통령의 신년 인터뷰를 받아 중대선거구제 논의에 불을 붙인 김진표 국회의장이 "현행 소선거구 제도는 사표가 많이 발생해 국민의 뜻이 제대로 선거 결과에 반영되지 못하고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로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며 "호남에서도 보수 정치인들이, 대구·경북에서도 진보 정치인들이 당선될 수 있는 정치제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양당제서 정당내 다양한 목소리 보장
일본 중대선거구제 당시 자민당 모델
우경화 일색 방지하고 계파간 '견제'
정당내 다양성 보장도 우리나라와 같은 양당제에 있어서는 중요한 지점이다. 중대선거구제는 다당제를 촉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993년까지 일본 정치는 중대선거구제였지만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제였기 때문이다.
최대 5~6인 선거구까지 있는 중대선거구제에 맞춰 일본 자민당 내에는 다나카파·후쿠다파·미키파·나카소네파·다무라파의 이른바 '5대 파벌(계파)'이 존재했다. 계파별로 복수의 공천 후보를 내서 총선을 치른 뒤, 살아돌아온 의원 수에 따라 자민당 총재를 뽑고 총리를 결정한 것이다.
과거에는 이를 계파 정치의 구태로 보고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되레 우경화 일색을 방지하고 자민당 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보장했던 긍정적인 측면이 조명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대선거구제가 화두에 오르자, 기존 거대 양당의 비주류·소수파로 분류되는 중진 정치인들이 환영의 목소리를 낸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것은 지금의 양당 독과점 구조를 깨부수고, 특히 소수파가 원내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유승민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도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우리 정치가 더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라고 환영했다.
인지도·금권정치 판치는 게 최대 단점
다나카 가쿠에이 '금맥정치'의 배경
'전주도 익산도 아닌 곳' 다 묶일 수도
당연하지만 중대선거구제도 장점만 있는 제도는 아니다. 중대선거구제가 선거제도의 '정답'이라면 의회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을 비롯해 미국 등 다수 국가가 여전히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는 이유와, 일본과 우리나라가 한때 시행했던 중대선거구제를 버리고 소선거구제로 돌아선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대선거구제의 단점으로는 △인지도 정치·금권정치 조장 △정치신인의 진출 봉쇄 △지역구의 광역화와 유권자 동질성 훼손 등이 꼽힌다.
중대선거구제는 현행 소선거구제 지역구 2~5개를 합쳐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선거구의 면적이 넓어진다. 따라서 유권자가 후보자의 면면을 속속들이 파악하기 어렵고, 선거운동기간 중에 접촉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이름을 들어본 듯한' 인지도 높은 중진 정치인과, 조직을 동원하고 유지할 역량이 되는 금권 정치인에게 유리해진다.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전북은 현재 10개의 지역구로 이뤄져 있는데,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면 3개의 선거구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DY(정동영 전 의장)와 같은 경우에는 어느 선거구에 출마해도 당선권 내에 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지도가 모자라다면 돈으로 조직을 동원하는 금권정치를 해야 한다. 악명 높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금맥정치'는 일본이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던 시절의 일화다.
이로 인해 정치신인의 원내 진출 기회도 좁아진다. 일각에서는 중대선거구제는 4~5등도 당선되므로 '허들'이 낮아져 정치신인의 진출에 유리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중대선거구제 아래에서 당선되는 '정치신인'들을 보면 시민사회단체나 노조 관계자 등 지역에서 확실한 '조직표'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순수한 정치신인이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지역구의 광역화도 문제다. 전북이 3개의 선거구로 재편된다면 전주 갑·을·병, 그리고 익산 갑·을과 군산은 생활권으로 묶인다고 쳐도, 나머지 1개의 선거구는 아무런 동질성이 없이 '전주도 아니고 익산도 아닌 곳들'이 묶이는 셈이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회의원 선거구 유권자들의 동질성을 해치고 지역대표성을 약화시킨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립·갈등 완화? 일각에선 '물음표'
"룰 바뀌면 지형 바뀌어…호남·TK서
더 좌경화·우경화된 신당 출현할 것"
장점으로 거론되는 △사표 방지와 △대립과 갈등의 정치 완화 효과에 대해서도 일각에서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사표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선거는 대선이다. 대선은 선거의 속성상 1등 후보자 한 명만이 당선될 수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사표기 때문이다. 김진표 의장이 지적한 "승자독식의 극한대립"이란 사실 총선이 아니라 대통령 권력을 두고 사생결단으로 맞붙는 대선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이다. 대선을 도외시한 채 총선의 사표 문제를 운운하는 게 사리에 맞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정치개혁의 하나로 선거제도 개편이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권력구조 개편 (논의)이 빠진 것은 아쉽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대립과 갈등의 정치를 완화하는 효과도 과연 실제로 구현될 것인지 물음표가 달린다.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됐는데도 그대로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양당제가 유지되면서 상대 정당의 '텃밭'에서 우리 당 후보가 2~3등으로 당선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자 위성정당이 생겼듯이, '룰'이 바뀌면 반드시 정치의 지형도 바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호남에서는 민주당보다 더 왼쪽의 정당, TK에서는 국민의힘보다 더 오른쪽의 정당이 생겨서 차점자와 3등으로 대거 원내에 진출할 수 있다"며 "이렇게 될 경우,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양극단의 정당들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기존 거대 양당을 흔들어 오히려 좌우 대립과 갈등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