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가스 조작 적발 직후 실라키스 사장 '도피성 출장' 후 미복귀
후임 사장이 뒷수습 뒤집어쓸 판…결국 한국인 직무대행 체제로
국내 1위 수입차 업체인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에서 대표이사 사장 직무대행 체제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전임 사장이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난 상황에서 후임자가 한국 부임을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6일 벤츠 코리아에 따르면, 벤츠 본사는 전날 김지섭 고객서비스 부문 총괄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을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당초 뵨 하우버 벤츠 스웨덴 및 덴마크 사장이 이달 1일부로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에 내정됐었으나 그가 한국행을 거부함에 따라 김 부사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된 것이다.
이로써 지난 5월 전임 대표이사인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사장의 갑작스런 출국으로 시작된 벤츠코리아의 지도부 공백은 ‘직무대행’이라는 비정상적 체제로 임시 봉합됐다.
실라키스 사장은 한국 수입차 업계에서 가장 화려한 명성을 쌓은 외국인 사장 중 하나로 꼽혀왔으나 마무리는 가장 불명예스럽게 이뤄졌다.
지난 2015년 9월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로 부임한 실라키스 사장은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벤츠 브랜드를 1위로 올려놓은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실라키스 사장이 부임하던 해인 2015년만 해도 벤츠의 국내 판매량은 4만6994대로 BMW(4만7877대)에 이은 2위에 머물렀었다. 당시까지 국내 수입차 시장 최대 세그먼트인 럭셔리 중형 세단 중 최고 인기 모델은 벤츠 E클래스가 아닌 BMW 5시리즈였다.
하지만 실라키스 사장이 본격적으로 지휘봉을 잡은 2016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2016년 5만6343대로 국내 수입차 시장의 4분의 1(점유율 25.0%)을 독식하며 단숨에 수입차 1위로 올라선 벤츠는 2018년 6만8861대, 2018년 7만798대, 2019년 7만8133대 등으로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점유율도 지난해 31.9%로 다른 수입차 브랜드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벤츠 판매망 중 벤츠 코리아가 차지하는 위상도 달라졌다. 전세계 벤츠 판매국 중 한국이 다섯 번째로 많은 국가가 됐다.
렉서스에서 시작된 ‘강남 쏘나타’의 계보는 BMW 5시리즈를 거쳐 실라키스 사장 체제에 와서는 벤츠 E클래스가 차지했다. 그만큼 거리에서 E클래스가 많이 보인다는 의미다.
하지만 환경부가 벤츠코리아 차량의 ‘배출가스 불법조작’에 대해 과징금을 꺼내 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환경부는 지난 5월 벤츠가 판매한 디젤차 3만7154대에서 배출가스를 불법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인증 취소와 함께 과징금 776억원을 부과하고 형사고발 조치했다.
그동안 벤츠의 고성장 원동력 중 하나가 ‘불법 조작’이 아니었냐는 비난까지 나왔다.
배출가스가 조작된 차량의 판매 시기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로, 실라키스 사장의 재임 기간과 상당부분 겹친다. 굳이 재임 기간을 따지지 않더라도 벤츠 코리아의 대표이사로서 실라키스 사장의 해명과 수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라키스 사장은 전면에 나서 사태를 수습하는 대신 ‘도피’를 택했다. 환경부 발표 직후 업무상 출장을 핑계로 독일로 떠난 뒤 남은 2개월여의 임기 내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피성 출장’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행태였다.
그런 실라키스 사장의 뒤를 이어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로 내정된 이가 뵨 하우버 사장이었다.
하우버 신임 사장은 지난 5월 한국 부임 발표 당시 벤츠코리아를 통해 “벤츠 코리아 사장으로 새로 부임하게 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한국 시장에서 벤츠만의 차별화된 가치와 최고의 고객만족을 제공해 성공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랬던 그가 막상 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 부임 거부를 택한 것이다.
벤츠 코리아 측은 하우버 사장의 부임이 무산된 배경에 대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올 수 없게 되면서 고민 끝에 한국행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지만, 해당 사안을 전임 사장 시절에 발생한 일련의 사태와 연관 짓는 시각도 있다.
하우버 사장이 벤츠 코리아에 부임할 경우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임자 시절에 이뤄진 배출가스를 불법 조작 사태를 수습할 책임을 지게 되니 누가 생각해도 흔쾌히 한국행을 결정하기 힘든 상황이다.
과거 다른 수입차 브랜드들이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해당 업체의 대표이사가 검찰 조사를 받거나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 곤욕을 치른 전례를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독일 벤츠 본사는 한국행을 꺼려하는 다른 지역 출신 임원을 파견하기보다는 배출가스 관련 이슈가 발생한 기간 동안 한국에서 근무했고, 한국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한국인 부사장에게 직무대행을 맡겨 ‘뒷수습’을 담당토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18년 BMW코리아가 화재사태로 논란을 빚었을 당시 한국인 CEO인 김효준 회장이 발 빠르게 리콜 조치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비교적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한 전례를 참고했을 여지도 있어 보인다.
업계 한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어떤 외국인 CEO가 전임자 시절에 발생한 물의를 대신 수습하기 위해 한국에 오려 하겠느냐”면서 “벤츠 본사 입장에서는 한국인 직무대행에게 사태를 수습도록 한 뒤 원만하게 마무리된 이후 정식 대표이사를 선임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