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고문 “반도체 성공, 총수 결단력 때문”
이재용, 대규모 투자로 ’포스트 삼성‘ 밑그림
오너 공백, 기업 미래 담보...국가 경제에도 위기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별세로 이재용 부회장의 시대가 열렸다. 이 부회장은 6년전부터 실질적인 총수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그동안 추진해 온 변화와 혁신이 새로운 삼성, 뉴 삼성과 맞물려 가속 페달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과 이 부회장에 앞에 놓여진 기회와 위기, 과제 등을 살펴본다.<편집자주>
지난달 2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떠나보내고 불과 하루만에 회사로 출근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슬픔을 억누를새도 없이 산적한 현안을 직접 챙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역대 최대 실적을 거둔 삼성전자는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을 통해 올해 35조2000억원을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중 현재까지 25조5000억원이 집행됐다.
코로나19 감염증 등 급증하는 불확실성으로 경제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위기에도 선제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의지다. 그의 메시지대로 삼성전자는 미래 기술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올해 3분기 누적 R&D비용은 15조 8951억원으로 역대 최고 R&D투자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은 ‘사법리스크’라는 암초를 만났다. 이 부회장은 오는 9일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의 공판기일을 앞두고 있다. 내년 1월부터는 경영권 불법 승계 관련 재판도 본격화 될 전망이다. 최고 5~10년 재판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다. 회사가 사법리스크에 얽매여 혁신동력을 다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 “만년 적자여도...” 오너의 결단, 10년 대계 결정
‘재벌 오너’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는 초대형 투자는 오너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재임기간 3.3년(CEO스코어의 2018년 30대그룹계열사 265곳 사업보고서 전수 조사결과 기준)에 불과한 전문기업인의 판단만으로 몇 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국 경제의 손꼽히는 효자 산업인 반도체 부문 역시 고 이 회장의 결단이 이뤄냈다. 1987년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누적 적자가 1400억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지시로 생산라인 증설을 결정, 1년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한다. 1990년대 반도체 불황일때도 경쟁국가는 투자를 축소했으나 삼성은 오히려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끈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지난 7월 사내방송 인터뷰를 통해 “반도체는 투자 규모가 커 위험 부담이 큰 사업이었지만, 매 순간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성공을 가능케 했다”고 회상했다. 권 고문은 “앞으로도 위험한 순간에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층의 결단,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배터리 사업에서도 혜안은 적중했다. 1998년 이 회장의 천안 배터리 공장 3000억원 투자는 10년뒤 ‘소형 배터리 부문 세계 1위’로 돌아왔다. 삼성전자는 2010년 5대 신수종 사업 중 하나로 바이오를 꼽고 202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하겠다고도 밝힌 바 있다.
오너들의 장기 투자는 국내만의 사례가 아니다. 미국 대표 유통기업인 월마트는 창업자 일가가 1970년대부터 배송 시스템과 재고관리 등에 투자해왔다. 기존 선두업체인 K마트를 제치고 현재 소매업 1위를 굳건히 사수중이다. 스웨덴의 1위 재벌기업 발렌베리 가문 역시 장기투자를 당연시해오고 있다. 연 매출이 1000억 달러(한화 약 113조5000억원)가 넘는 발렌베리 소유 기업의 생산량은 스웨덴 총생산의 30%에 달한다.
◆ 고삐죄는 이재용, 대형 투자 및 글로벌 행보 가속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삼성의 DNA는 이 회장을 거쳐 이 부회장의 ‘초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이어 인공지능(AI), 5G, 바이오, 전장을 4대 미래 먹거리로 꼽고 이를 중심으로 ‘뉴 삼성’의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 회장 와병 이후 6년간 그룹을 맡아온 이 부회장은 대규모 투자와 굵직한 인수합병(M&A)을 단행했다. 2014년 사실상 총수 역할을 대신하자마자 삼성SDS 상장 직후, 방산 및 화확 계열사 4곳을 한화에 매각하는 빅딜을 했다. 2015년에는 삼성SDI 케미칼 사업부와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등을 롯데에 매각하며 삼성그룹을 전자, 물산, 금융 등으로 재편했다.
2016년에는 미국 전장기업 하만을 80억 달러에 인수했으며, 2018년에는 향후 3년간 180조를 투자 및 고용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했다. 지난해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육성하겠다는 초대형 사업 구상도 밝혔다.
지난 9월에는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 버라이즌과 약 8조원 규모의 5G통신장비공급 계약을 성공시키며, 한국 통신장비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수출계약을 이뤄냈다. 4G LTE때부터 직접 기술 개발 및 사업화를 챙겨온 이 회장의 헌신과,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최고경영자(CEO)와의 10년 인연이 8조원 계약 달성의 성공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출장을 마치고 돌아온지 5일만에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해외 출장 일정도 숨가쁘게 소화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 생산 사업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고 삼성전자의 연구 개발 센터 공사현장, 스마트폰 및 가전 사업장 등을 방문했다.
◆SK, 최태원 회장 공백으로 4조 날려..잃어버린 10년 또?
재계는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로 인해 삼성의 초격차 전략이 차질을 빚는건 아닌지 우려하는 분위기다. 삼성은 2017년 국정농단 사건 이미 1년간의 총수 부재를 겪은 바 있다. 실제 하만 이후 대형 M&A를 성사시킨 적이 없으며, 이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후인 2018년에야 투자를 재개했다.
오너십 부재로 인한 리스크를 겪은 대표적 사례가 SK그룹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2년 초 횡령혐의로 기소된 후 2013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태원 회장이 2015년 8월 사면 복권으로 경영에 복귀하기 전까지 SK그룹의 투자 시계는 멈춰있었다. 업계에 따르면 2013년 STX에너지 인수를 포기했으며, 2013년 ADT캡스 인수, 2014년 호주 유류업체인 UP의 지분 인수 시도를 중단했다. 2015년에는 중국 충칭 부탄디올 합작법인 설립 중단도 무산됐다. 포기한 M&A 규모만 총 4조원에 달한다.
SK그룹 역시 최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후부터 OCI머터리얼즈 인수를 시작으로 30여건의 M&A 및 공격적인 투자가 진행됐다. SK그룹의 핵심 성장동력으로 손꼽히는 SK하이닉스 역시 최 회장이 반도체 불황기였던 2012년 3조4000억원의 빅딜을 규모시킨 성공 사례이다. 최 회장은 경영진들의 반대가 극심하자 "나의 애니멀 스피릿(동물적 감각)을 믿어달라"며 그룹 내부 목소리를 설득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최 회장은 또 한 번 ‘통큰 베팅’을 단행한다. SK하이닉스는 최근 글로벌 반도체 1위 기업인 미국 인텔의 낸드 사업 부문을 10조3000억원에 인수하며 주목을 받았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2018년 2월 법정에 구속된 이후 실적 급락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1조~3조원대 순이익을 기록했던 롯데는 2018년과 2019년 6000억원 미만의 순이익을 내는데 그친다.
이 부회장은 2016년 11월 이후 4년가까이 사법리스크에 시달려왔다. 여기에 앞으로 남은 재판까지 포함하면 “잃어버린 10년이 현실화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삼성의 주력사업인 반도체 사업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메모리 부분 인수, 엔비디아의 ARM 인수 등 한치앞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코로나19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 미국의 화웨이 제재, 한일 외교 갈등 등 글로벌 ‘험로’도 예상된다. 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이끌 이재용 부회장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