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와 한수의 이야기가 너무 애달프고도 아름다워 거기서 멈추고 싶었다. 자기 자신은 없고 가족을 위한 희생과 이웃에 대한 배려로 살아온 정은희의 ‘소녀 같은 첫사랑’을 정말이지 실감 나게 연기한 배우 이정은,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다 자식 교육에 인생을 건 게 죄가 되는 장남이자 첫사랑의 호의마저 잠시 빚내는 데 이용하려 하는 애달픈 가장으로 분해 ‘인생의 쓴맛’을 본인 최고의 연기로 보여준 차승원 배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또 다른 무엇이 전개될지도 모르면서 ‘우리들의 블루스’(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김양희·이정묵, 제작 스튜디오드래곤·지티스트)와의 안녕을 고했다. 먹먹한 감성을 시간을 두고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두 아빠 얘기 봤어?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박지환 배우가 잘생겨 보여. 엄청, 울었어”. 상대의 개성을 존중해 누구에게 무엇을 잘 추천하지도 않고, 매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공대생’ 친구의 추천에 시청 중단을 멈췄다.
맞다, 연기를 잘하면 잘생겨 보인다. 긴 무명끝에 주로 극의 감초 역할이나 껄렁껄렁한 양아치 역을 맡아온 박지환 배우가 현(배현성 분)이 아빠 정인권으로 분해 새로운 감성 결을 꺼내 보였다. 평소 글(영화 시나리오 등) 쓰는 배우답게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다.
정인권은 깡패였다. 주먹과 칼을 가까이하는 일상에 경찰에 쫓기기 일쑤, 그로 인해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는 떠났다. ‘자식 보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어머니 유언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어두운 세계에서 손을 씻고 나와 잠잘 시간도 없이 돼지 내장을 손질하고 뼛국물을 고아 순댓국을 말아 팔면서 하나뿐인 자식을 키웠다. 다행히 아들은 전교 2등도 하고 5등고 하며 의사를 꿈꾸는, 밥도 하고 집안일도 하는 착한 아이로 성장했다. 아들에게 입과 손은 거칠게 대해도 아끼는 마음은 뜨거운 아빠다.
우리나라 아니 세계 어디나 그렇겠지만 기회를 주면, 스포트라이트만 비추면 언제든 주연일 수 있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참 많다. 최영준 역시 연극과 뮤지컬, 드라마에서 크고 작은 역할들로 대중에게 자꾸 다가서더니 이번엔 제대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잘생긴 거야 그냥 봐도 보이는데, 가수 출신답게 노래마저 잘한다. 조용하다가 폭발하는 감정, 분통 처지는 눈물이 압권이다.
방호식은 지지리 가난했다. 착하고 따뜻한 성품으로는 사랑을 지킬 수 없었다. 가난으로 첫사랑 은희에게 차였고, 목돈 쥐어보겠다고 도박에 빠졌다가 아내마저 잃었다. 인권이 형이 조롱의 눈빛과 모욕의 말끝에 동냥한 돈을 내팽개치고, 돈 없는 자신을 밀어낸 첫사랑을 찾아가 돈을 빌려 인생을 ‘리셋’(초기화) 했다. 누구보다 깨끗하고 예쁜 얼음을 얼려 시장 상인들에게 납품하며 엄마 없는 딸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그 마음에 보답하듯 영주(노윤서 분)는 부동의 전교 1등에 손 갈 일이 없는 야무진 성격의 아이로 자랐다.
내 모든 것을 바쳐 하나뿐인 아이를 키운 아빠들, 아빠들의 자랑이자 동네방네 귀염둥이로 자란 아이들. 그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이 순식간에 깨져버릴 위기에 처한다.
둘도 없는 형 동생에서 눈빛만 부딪혀도 으르렁대는 원수 사이가 된 인권과 호식인데, 현이와 영주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 사랑한다. 혹자는 드라마 소재로 삼을 만한 애들 장난이냐고 꾸짖고 지적하지만, 외면하고 모른 척하려 해도 엄연한 사실인 그것도 드물지 않은 현실인 ‘고교생들의 임신’. 아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미성년 내 아들딸들의 임신이 호식과 인권을 절망에 빠뜨리고 불을 뿜는 용들로 만든다.
인생에 몰아닥친 더할 수 없는 폭풍에 휘말린 두 아빠는 당장 눈앞에 닥친 기막힌 위기감부터 과거부터 쌓여온 묵은 감정까지 모두 쏟아내고 토해내며 뒤엉켜 개싸움을 한다. 그런데 그 싸움과 어른으로서의 못난 짓이 흉해 보이지 않고 애잔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저 동갑내기 배우 최영준과 박지환이 몸싸움 장면을 찍은 게 아니라 방호식과 정인권이 겨우 빠져나온 ‘인생 늪’에 다시 빠져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더 깊이 빠뜨리는 줄 모르고 상대를 눌러서 나만 빠져나오려는 모습으로 연기했다면 눈물이 쏙 들어갔을 것이다. 호식과 인권, 인권이 형과 호식이 동생은 알았다. 이렇게 싸우는 게 상처를 키우고 서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고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금지옥엽 키운 내 아이에게 그럴 것인가, 길 가는 사람 붙잡고 그리할 것인가. 둘에겐 가슴속 타오르는 불을 뿜을 상대가 서로밖에 없었다.
영주와 현이의 선택은 매우 어렵고도 민감한 문제라 섣불리 재단하고 이게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려워서 더욱, 두 아빠의 미쳐 버리는 심정에 공감이 가고 내 일인 것처럼 눈물이 난다. 똑같은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인생에 복장 터지고 울화통 터지는 일이 얼마든지 있기에, 현상은 있는데 해답을 모르는 일이 너무나 많기에, 그런 인생 최대 위기에 짓눌려버린 두 아빠의 몸부림에 내 살갗이 아픈 것이다.
박지환과 최영준의 연기에 넋 놓고 울었다는 사람이 숱하다. 두 아빠의 캐릭터를 만들고 두 아빠를 통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 상황을 만든 노희경 작가와 연출가들, 제작진이 원하는 그 이상으로 인물을 빚고 상황을 겪어 우리 눈앞에 보여준 배우 최영준-박지환-노윤서-배현성. 마음의 탁한 때를 벗기고 무엇이 중한지를 다시 보도록 세상 보는 눈을 정화할 눈물이 필요한 시기, 그런 당신이라면 인권이네와 호식이네 속 깊은 이야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