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통사극이 돌아왔다. 바로 KBS 창립 50주년 기념작인 ‘고려 거란 전쟁’이다. 그동안 정통사극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방송사 입장에선 선뜻 시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체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방송사의 경영사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관객의 눈높이는 더욱 높아졌다. 인터넷을 통해 미국 드라마를 수시로 보게 된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더 냉정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거엔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던 소품 디자인, 고증, 전쟁 액션 등의 표현이 훨씬 까다로워졌다. 이젠 시청자를 만족시키려면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야 한다. 안 그래도 수익성이 떨어져 사극 제작이 어려워진 판인데 시청자의 눈높이 상향으로 더 여건이 악화된 것이다.
대하 정통사극이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공영방송 KBS가 책임감을 가지고 대하사극 제작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결국 KBS가 응답한 모양새다.
제작비가 270여 억 원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이 정도 대작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방송사가 받을 타격이 너무 크다.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되는 도전인 것이다. KBS는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 같다.
일단 빠르다. 기존 정통사극은 긴 호흡으로 진행됐었는데 ‘고려 거란 전쟁’은 270여 억 원을 투입해 2개의 전쟁을 그리는 대하드라마인데도 32회 분량이다. 마치 미니시리즈처럼 빠른 호흡으로 진행된다. 불과 5회 만에 정변으로 왕이 죽고, 태후가 실각하고, 새 왕이 즉위하고, 전쟁이 터졌다. 거란 침입 전에 흥화진 등에서 어떻게 전쟁 준비를 했는지를 더 자세하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 장면이 본격적이다. 기존 우리 정통사극에선 보통 전투 장면을 장수들의 대화로 표현했었다. 장수들이 성문 앞에 나란히 도열해 입으로 전황을 중계하는 식이다. 실제 액션은 10~20명 정도의 단출한 규모로 그려져 시청자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반면에 ‘고려 거란 전쟁’은 첫 회에서 귀주대첩을 마치 영화 같은 규모로 그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검차의 등장도 지금까지 사극에서 보지 못했던 표현이었다. 흥화진 전투에선 투석기를 자세하게 묘사해 일반적 드라마의 수준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줬다.
‘사극의 왕’인 최수종이 강감찬 장군 역할로 중심을 잡아주고 그 외 다른 배우들도 연기 구명 없이 열연을 이어가고 있다. 대본의 완성도도 높아서 명작 탄생의 예감이 든다. 반응도 좋은 편이다. 시청률 5.5%로 출발했는데 6화에서 7.8%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탔다. 콘텐츠시청분석서비스 키노라이츠의 주간(11월16일~11월22일) 통합 콘텐츠 랭킹차트에선 1위에 올랐다.
고려 거란 전쟁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전통 시대에 유목 제국 정예 기마병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특히 동북아시아 유목민 기마병은 세계 최강이었다. 당시 전성기였던 거란의 정예 기마 대군 침입에 고려는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조선시대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장쾌한 순간이다.
2차 침입 때는 강조의 고려군이 대회전을 벌인 결과 참패하지만, 양규 장군 등이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차 침입 때는 강감찬의 고려군이 귀주대첩을 벌여 거란 정예군단을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전성기 유목 제국의 정예 기마 군단을 농업국가가 정면으로 싸워 꺾은 사건으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사적으로 흔치 않은 쾌거다.
앞으로 강감찬 장군 뿐만 아니라, 2차 침입 때 활약한 양규 장군도 크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양규는 거란의 40만 대군을 흥화진에서 7일간 막아내 고려를 구했다.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후방이 불안해진 거란군은 결국 군을 쪼개 20만 명만 개경으로 진군시켰다. 양규는 흥화진을 지킨 것으로도 모자라,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며 수많은 고려인 포로들을 살려냈다.
이렇게 모두가 합심해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이야기는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많은 국민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거란 전쟁’에 기대가 큰 이유다.
제작비에 여유가 있었다면 흥화진 전투도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거란군을 추격했던 김숙흥을 비롯해 다른 인물과 이야기들도 더 풍성하게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아쉽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고려 거란 전쟁’의 만듦새는 합격점이다. 앞으로 양규의 분전이 어떻게 그려질지, 2차 침입 이후 현종과 강감찬이 어떻게 나라를 재건할지, 3차 침입 때 강감찬의 대승은 또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증과 기대가 크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