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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를 꿈꾸는 K-함정이 버려야 할 유산


입력 2024.04.17 07:07 수정 2024.04.17 10:03        데스크 (desk@dailian.co.kr)

비좁은 국내 울타리 넘어

초일류들 즐비한 국제무대에선

잔꾀와 꼼수로 경쟁 못해...

‘下手의 늪’에서 속히 벗어나야

ⓒ 한화그룹 ⓒ 한화그룹

바둑 십계명으로 불리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은 승부에 임하는 고수의 자세와 눈높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지침이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묘하게도 온통 ‘버려라’라는 주문으로 가득 차 있다.


첫 계명 부득탐승(不得貪勝)부터가 탐하여 이기려는 욕심, 즉 하수들 특유의 꼼수와 잔꾀를 버리라는 뜻이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사소취대(捨小取大)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말이고, 기자쟁선(棄子爭先)은 돌을 버리더라도 (작은 손실을 보더라도) 요처를 선점하라는 얘기다. 봉위수기(逢危須棄) 역시 위기에 봉착하면 모름지기 버릴 줄 알아야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다는 의미다.


위기십결도 결국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비결인데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상대방 뒤통수를 쳐서라도 이득을 취하라는 말은 없고 자꾸 내 것을 버리라는 건 대체 무슨 영문일까.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면 큰 숲을 보지 않고 나무의 잔가지만 들여다보는 근시안적 관점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 눈높이 교육은 고단자 품계에도 나타난다. 품계의 최정점인 9단은 ‘신의 경지’라 부르는 입신(入神)이고, 8단의 품계는 앉아서도 삼라만상을 굽어보는 좌조(坐照)의 경지다. 7단은 여러 관점을 고루 갖춰 완성의 단계에 이른다는 의미의 구체(具體)다. 더 높은 고수 반열에 오르고자 한다면 눈앞의 이해득실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더 넓게 보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는 걸 옛 현인들도 터득하고 있었다.


지금 조선업계는 한국형 차세대구축함사업(KDDX) 설계도면 탈취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2012년 이후 HD현대중공업의 군사기밀 유출로부터 시작된 사건의 여파는 12년이 지난 오늘까지 조선업계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대표나 임원이 사건에 개입한 객관적 증거가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사건의 성격 자체는 조직적 범죄에 연루된 현대중공업 관계자 9명에 대한 전원 유죄판결 확정으로 이미 결론 난 지 오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곁가지를 놓고 다투는 소모적 논쟁의 연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신해양시대를 개척해 가는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안을 보는 관점을 비좁은 국내시장에 한정하는 것부터가 전형적인 하수의 눈높이다. 항간에는 KDDX가 2030년까지 7~8조원이 투입되는 엄청난 특혜 사업처럼 알려졌지만, ‘특수선’이라 불리는 국내 군함 사업은 이른바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중후장대산업의 끝판왕 격인 조선업에서 연평균 1조원짜리 시장을 나누어 먹는 방식은 생산설비와 고용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라는 걸 업계는 너무도 잘 안다.


대형 조선업체에 특수선 사업은 당장 돈벌이보다 국가안보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유지해온 분야라고 하는 게 정당한 평가다. 그래서 그동안 국내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기반으로 넓은 세계무대로 진출해야 하는 건 군함을 포함해 모든 K-방산 업종이 지닌 당위이자 숙명이다.


최근 수출산업 전반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다행히 방산분야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고 범국가적, 범국민적 응원에 힘입어 전투기, 탱크, 자주포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실적과 국제적 신뢰도 쌓았다. K-방산은 유럽, 북미지역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 지도자들까지 한국을 찾을 만큼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이제 육군-공군 무기체계를 넘어 ‘방산 헤비급’이라 할 수 있는 잠수함, 구축함 등 해군분야에서 화룡점정을 찍을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런 시점에 K-방산 전반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퇴행적 습성을 흐지부지 넘기면 그 파장이 어떠할지는 자명하다. 더구나 초일류 강자들이 즐비한 해군 함정분야는 지금까지 사실상 남의 영역이었고 한국은 루키 신세나 다름없다. 고수들과의 경쟁은 잔꾀와 꼼수가 통하는 하수들의 세상과 차원이 다르다. 승부를 겨룰 핵심 경쟁력은 오직 실력과 도덕성뿐이다.


위기십결 제2계명 입계의완(入界誼緩). 남의 경계에 들어갈 때는 조급함을 버리고 나 자신을 한 번 더 살피라는 뜻이다. 역시 ‘버려라’ 범주의 계명인데 자신의 치명적 약점과 결함을 고치지 않고 세계적 강자들과 맞서보겠다는 건 허세이자 오만이다.


KDDX 사업을 지난 10여 년간 반복돼온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지속할 것인지, K-방산 세계화의 새로운 도약대로 삼을 것인지는 굳이 되물을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호가 더 높은 고수 반열에 오르고자 한다면 이제 버려야 할 악습은 과감히 털어버리고 ‘하수(下手)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유산이 절대로 아니지 않은가.

ⓒ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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