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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은 정부가 설게, 책임은 제조사가 져야지? [기자수첩-산업IT]


입력 2024.11.13 06:00 수정 2024.11.13 12:34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내년 2월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 시행…인증 주체 제조사→정부

인증 뒤 문제 발생 시 책임은 여전히 자동차 제조사 몫

비판 모면 위한 ‘탁상공론’식 정책 대응이란 비판 나와

ⓒ게티이미지뱅크

신차를 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면 책임은 누가 질까? 바로 자동차 제조사다.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가 안전기준에 부적합하거나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결함이 있는 경우 그 결함 사실을 해당 소유자에게 통보하고 시정 조치를 취함으로써 안전과 관련된 사고와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 자동차 제조사는 20년 전부터 스스로 안전기준에 적합함을 인증하고 판매해야하는 ‘자기인증제도’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제조사가 스스로 책임지는 이 제도는 내년부터 사라질 예정이다. 내년 2월부터는 전기차에 탑재하는 배터리에 대해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가 시행되면서 인증 주체가 정부로 바뀐다. 지난 20여 년간 배터리 분야에서 시행된 안전성 사후 검증 방식(자기인증제)을 폐지하고 정부가 직접 인증을 하겠다는 취지다. 올해 8월에 발생한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 사건으로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커지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정부가 사회적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직접 팔을 걷고 배터리 안전성 검증에 나서겠다는 것은 기존 제조사가 스스로 검증할 때 보다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부가 인증한 뒤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까?


놀랍게도 정부의 깐깐한 검증 뒤에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도 여전히 제조사의 몫이다. 내년부터 판매될 전기차 역시 문제가 발생하면 일차적으로 자동차 제조사가 책임을 진 뒤, 추후 검증을 통해 배터리 결함일 경우 배터리 제조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정부가 배터리를 인증한다고 해서 제조사들이 책임을 덜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상한 일이다. 배터리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정부가 차에 결함이 발견됐을 때는 ‘쏙’ 빠진다니. 검사는 해주지만, 보증은 하지 않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 운영하는 e-나라표준인증에 따르면, 인증제도에서 인증의 정의는 ‘제품, 시스템, 자격, 서비스 등에 대해 규정된 요구사항이 충족됐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증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 ‘책임’지고 틀림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정부의 요상한 배터리 인증제는 나라에서 정한 ‘보증’의 범위 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꼴이다. 자동차 제조사 입장으로서는 정부가 규정한 절차를 모두 준수하고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독박’행이다. 배터리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배터리 제조사에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이마저도 아니라면 온전히 전기차 제조사의 몫이다.


인증 주체가 정부일 뿐, 검증 방법이 기존과 달라진 것도 없다. 배터리 문제를 정확하게 바로잡기 위해선 ‘셀’ 단위의 검사가 필수적이지만, 정부 역시 그간 업계에서 도입했었던 ‘팩’ 단위의 검증을 내세웠다. 배터리의 경우 팩 단위로 검사할 경우 팩 포장 단계에서의 작업 오류나 셀 단위의 문제를 잡아내기 어렵다.


한 자동차 전문가는 정부의 배터리 인증제와 관련해 “예전에는 사후 검증 절차를 통해 신고한 게 맞는지를 봤는데 지금은 미리 테스트를 한 뒤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라 시점의 문제일 뿐, 테스트 방법이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며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시간적 지연만 생겼고 기술적인 안전도 면에서는 업그레이드된 건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부의 개입이 갖는 의미는 뭘까. 정부 검증의 책임까지 자동차 제조사가 떠안게 된다면 과연 이번 대책이 실효성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시행도 되지 않은 배터리 인증제를 두고 정부가 전기차 화재 관련 비판에서 모면하기에 급급해 ‘탁상공론식’ 정책 대응을 했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이유다. 이런 와중에도 정부 눈치에 제조사는 지금도, 내년에도 입을 열 수 없다.


정부의 책임 소지에서 벗어나 배터리 인증 주체가 늘어나면 제조사들이 배터리 안전성을 자체적으로 강화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전기차 안전성이 강화될 수 있다면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전기차 캐즘(일시적 정체기)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 제조사들의 발을 묶어두고 눈치싸움을 심화시킨다면, 향후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에 나서서 정부가 총대를 메고 배터리 인증 강화를 앞세우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전기차가 실질적으로 더 많이 보급되기 위해선 차를 산 이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문제가 생기더라도 촘촘하고 체계적인 사후처리가 될 수 있도록 안심시키는 일이 먼저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부의 안정성 검증을 받은 새 전기차가 아니라, 화재 걱정없이 가족을 태울 수 있는 전기차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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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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