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원흉 반드시 척결한다더니
이재명에게 기사회생 기회 열어줘
박근혜 탄핵정국과 구조 흡사하다
윤석열 대통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155분 짜리 비상계엄을 선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헌법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제77조 ⑤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장악돼 있다. 계엄령 선포 즉시 해제를 결의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는 나름의 대안이 정밀하게 마련됐을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피를 토하는 심정’을 피력하면서 설마 이처럼 무대책일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려면 그 자신 법률가이기도 한 대통령이 면밀한 검토와 계산도 없이 더불어민주당의 ‘계엄령 미끼’를 덥석 문 것으로 생각했을까.
망국의 원흉 반드시 척결한다더니
명색이 일국의 대통령이면서 이처럼 허망한 한밤중의 정치쇼를 하다니! 민주당이 “이래도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거야?”라고 충동질한 말에 넘어가 “그래 계엄령의 맛을 보여주마!”라고 한 것 같은데 이렇게 무모할 수 있었다는 게 어이없다. 대한민국 군대의 전략 전술 부재 현상이 이토록 심각할 줄도 물론 몰랐었다.
그래서 비상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이며 이를 위해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괴물’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해”라니까 “예, 알겠습니다”라며 없던 일로 해버리다니!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킬 괴물이라는 확고한 신념과 증거가 있었다면 그 국회의 명령에 금방 굴복하고 마는 것은 ‘괴물’ 국회에 의해 무너지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해야 하지 않았는가.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정부가 비상계엄이라는 수단으로 국회를 유린하는 따위의 구시대적 대응 방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서 굴절되고 있는 정치과정을 바르게 펼 수 있다면 그건 대통령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 지금의 헌법 구조상 입법부는 행정부 사법부의 상위에 있다. 게다가 특정 정당이 국회의 입법과정을 장악하게 되면 국가의 권력과 기능은 대통령이 아니라 그 정당의 대표에게 넘어가게 돼 있다.
그 정당과 그 대표가 입법부를 장악하고 입법권력을 당 대표의 범법 혐의 해소에 무제한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한 양상인가? 이 같은 입법부의 행패에 대해 정부와 (소수) 여당이 제도적으로 속수무책이라면 비상한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윤 대통령은 그걸 ‘계엄령 선포’로 인식한 것 같은데 이건 민주당이 바라던 바다. 이를테면 임기 단축이나 탄핵소추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미끼였던 셈인데, 윤 대통령이 물어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이재명에 대한 사법적 징벌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막을 방법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에게 기사회생 기회 열어줘
그간 민주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무기로 입법부를 자당의 법률등록소로 전락시켰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재명 대표 개인의 호위대 역할을 맡기기까지 했다. 현 정부 출범 후 민주당이 발의한 정부 관료 탄핵소추가 22건이었다고 윤 대통령은 밝혔다. 이 대표 수사를 담당하는 검사들을 골라서 탄핵소추를 발의하거나 의결하는, 후안무치한 저항행위를 저질러 왔다. 언론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 유지를 위해 대통령이 지명한 방송통신위원장 2명을 ‘탄핵 압박’으로 사퇴시키고 1명을 탄핵 소추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안보·에너지 정책 실정의 의혹을 감사했다고 해서 감사원장에 대해서까지도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국가 및 정부 기관들에 코뚜레를 끼우겠다는 심산이다. 그런데도 특정 정당과 그 대표의 입법권 사유화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것이 대한민국의 법체계다.
이런 국회에 대해 여당은 어떤 제동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속수무책 당하기만 해왔다. 민주당은 입법부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면서 이 대표를 치외법권 지대로 빼내겠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국가의 입법권과 그 기능이 이처럼 특정인의 보신용 사적 도구로 오·남용되게 방치한다면 우리의 대의민주정치는 자기부정의 길로 치닫게 된다. 그런 식으로 범죄 혐의를 벗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선정을 베푸는 성군이 될 수 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대의민주정치는 의의를 상실하고 민주공화의 정치는 권위주의 독재 세력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민주당은 제동력을 상실한 폭주기관차가 되어 있다. 걸핏하면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원회에서 소리를 지르는 면면을 보라. 사흘이 멀다 하고 탄핵소추안, 특검법안을 발의하는 문건이 든 봉투를 영정처럼 가슴에 안고 이를 제출하러 국회 의안과로 가는 의원들의 행렬을 보라. 이런 모양으로 한국의 의회정치는 파국을 향해 레밍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민주당 이 대표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열어줬다. 일거에 자신의 범죄 혐의를 모두 삭제해 버릴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의사당에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얼쩡거리던데, 그 또한 신분 세탁의 기회를 얻었다고 들떠 있을 법하다). 윤 대통령은 국회의 명령에 따라 계엄령 해제를 선언하는 순간 천하 제1바보, 국민적 매품팔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민주당 이 대표는 국회의 계엄령 해제 요구안이 의결된 직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긴급기자회견을 열었다.
박근혜 탄핵정국과 구조 흡사하다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이제까지 입법을 농단하면서 대의민주정치의 본령과 의의를 훼손시키던 그 장본인이 ‘민주공화정 회복’을 말하게 되다니! 8개 사건에서 12개 혐의로 5개의 법정에 서게 돼 있던 그가 ‘민주공화정의 수호자’, ‘국민의 보호자’로 등장한 것은 차라리 코미디다. 윤 대통령이 쫓겨나는 그 자리를 여유롭게 차지할 그의 표정을 상상해 보라.
이처럼 윤석열 발 정변이 불과 2시간 35분 만에 이재명의 KO승으로 마무리되는 상황에 기가 막힌다. 윤 대통령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인가. 국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계엄을 해제한 것으로 사태가 무마될 것으로 정말 믿는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까지 민주당과 한편에 섬으로써 대통령 탄핵이 불가피해졌는데도?
윤 대통령의 ‘무모한 도전, 참담한 패배’가 보수정권의 몰락을 재촉할 게 뻔하다. 한 대표와 국민의힘은 ‘불법적 위헌적 계엄령’을 좌절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하겠지만 결국은 윤 대통령과 같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 이 대표와 그의 팬덤이 한 대표의 공로를 인정해 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대표는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나라·국민을 지킬 동지로 ‘저와 우리 민주당 국회의원 그리고 많은 이들’을 꼽았을 뿐 한 대표와 국민의힘은 끼워주지를 않았다. 박근혜 탄핵 정국의 재판, 싱크로율 90% 이상의 데자뷔가 될 것이다.
자유우파 국민들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활시킨 정권을 그 선장이 가라앉혀버리다니!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멸을 택했다는 것인가? 침몰 위기의 선상에서 서로 멱살잡이하는 ‘친윤 친한’이 원하는 건 또 무엇인가? 지금의 보수정권, 그러니까 정부와 여당은 그냥 과거 그대로의 보수일 뿐 새로운 이념과 의지와 정서로 일신(一新)된 세력은 아니다. ‘자유우파’를 진작 선언했던 일개 필부로서의 나는 거기에 끼고 싶지 않다. 당신들은 ‘자유우파’를 자칭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 이 나라 보수 정치세력이여 안녕!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