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힙하지 않고 특정인들만의 것이라는 인식이 진입장벽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흥행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때 창작의 동력으로 주목받았던 '페르소나'와 '사단'의 문화가 이제는 정체성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논의가 뜨겁다. 관객들은 익숙한 조합과 반복적인 서사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며, 변화와 도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반복적인 협업을 지양하고, 새로운 배우들과의 조합을 통해 신선함을 유지하는 감독들도 있다.
'박쥐'로 김옥빈을, '아가씨'에서는 김태리라는 배우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박찬욱 감독이 대표적이다.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 탕웨이를 주연으로 기용해 기존과는 다른 섬세한 감정 표현과 강렬한 미장센으로 본인 특유의 서사를 새롭게 확장했다. 탕웨이와 박해일의 새로운 케미스트리는 국내외 관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박 감독의 이러한 접근은 안전한 '페르소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얼굴과 서사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훈정 감독도 같은 맥락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마녀' 시리즈 1편에서는 김다미, 2편에서는 신시아를 발굴했으며 '폭군'에서는 신예 조윤수를 중심으로 또 다른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 시리즈의 동력을 지속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대우 감독 또한 기존에 손발을 맞추던 배우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언제나 영화의 방점을 새 얼굴에게 부여한다. 김 감독은 '방자전'의 조여정, '인간중독'의 임지연, '히든 페이스'의 박지현 등의 새로운 면모를 끌어올렸다.
이런 성공적인 사례들은 오늘날 반복되는 ‘영화계 협업’의 한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페르소나와 사단은 과거 한국영화의 부흥기를 이끌며 관객에게 다양한 장르적 체험을 제공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관행이 특정 배우나 감독의 작업물에만 흥행 가능성을 집중시키는 경향으로 이어지면서, 한정된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결과적으로 유사한 이야기와 장르의 작품들이 한국영화의 주류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은 새로운 조합과 이야기를 기대하지만, 여전히 일부 감독과 제작사는 기존의 ‘안전한 선택’을 고수하는 평행선의 모양새까지 보이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충무로 간판 배우가 아직도 40~50대 남성 배우로 한정돼,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에 ‘같은 감독’ ‘같은 제작사’와 반복적으로 손발을 맞추기까지 하면서 신선함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요구와 점점 어긋나고 있다.
관계자들의 입장은 영화계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이 문제에 대해 공감하지만 한국영화 위기로 인해 당장은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이 중론이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작품에 관객들이 고개를 젓고 있지만, 대안이 없기에 그나마도 그 ‘반복된 이미지’를 믿고 가야 하는 상황이란 셈이다.
배급사 관계자 A씨는 "결국 만드는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다. 우리도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 하지만 프로젝트로 수익을 내야 하는 게 기업의 본질이다. 비단 영화 산업만은 아닐 것이다. 많이 사랑받은 결과물을 기반으로 보수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영화를 만들거나 준비하는 사람마다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적, 비전이 다르다. 그 중심점에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라며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 생태계 발전을 도모해보자라는 마음은 있으나 지금은 너무 영화 시장이 위축돼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이전부터 지적됐다. 그러나 예전에는 제작편수 많아 지금보다 두드러지지 않아 보였다. 예를 들어 10편을 만든다면, 분산 투자 개념으로 2~3편 정도는 도전을 해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면 풍요로워야 하는데 지금은 영화산업 자체가 위축됐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작품수가 적은데 그나마도 반복된 작품이 많으니 관객들이 더욱 크게 와닿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시장에 '윤시내가 사라졌다', '세기말의 사랑' 영화를 비롯해 OTT 오리지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살인자ㅇ난감' 등에서 연기를 너무 잘하는 새 얼굴 노재원이 등장했을 때 다들 너무 반가워 하지 않았나. 계속 신선한 이야기와 배우를 발굴해 가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는 있다"라고 말했다.
제작사 관계자 B씨는 "최근 관객 경향 중에서는 영화 관람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 대비 실패하지 않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시리즈물의 강세가 그런 선택을 방증한다"라며 "‘OOO표 김치찌개'처럼 아는 맛을 원하는, 믿고 보는 조합에 대한 니즈 또한 존재하기에 익숙한 캐스팅에 새로움을 더할 한 끗 차이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소재가 독특하다면 캐스팅은 안정적으로 가는 식으로 변주를 주는 방향을 모색하려고 한다"라고 나름의 돌파구를 털어놨다.
다른 관계자 C씨는 "'그 나물에 그 밥' 조합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에 대한 피로도는 임계점을 넘었고, 이는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들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독립영화의 다양성도 무너지면서 한국영화 발전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한국영화 시장이 위기에 몰리면서 새 얼굴로 도전하기보다는 페르소나, 사단의 감독, 배우들과의 작업에 투자가 더 집중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빨리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관객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감독들 또한 이러한 현상에 책임감을 갖고 있다.
D 감독은 "익숙한 배우들과 작업하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시간이 절약되고, 서로의 강점을 활용해 작품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주기 위해 새로운 얼굴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낀다"라며 "OTT 플랫폼이 신인 배우를 발굴하며 흥행에 성공한 사례를 보며 극장 영화에서도 이런 시도를 더 늘려야 한다고 느낀다.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넘어 관객들이 기대하지 않은 조합으로 놀라움을 줄 필요가 있다. 관객들이 어느새 영화는 힙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고, 특정인들만의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짙어졌다"라고 밝혔다.
이어 "최근 커뮤니티를 모니터하다가 영화인들을 향해 '거룩이들'(위선떠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더라. 수요 파악도 안하고 새로운 도전은 하지도 않고, 신인 감독이나 배우 밀어줄 생각이 없으니 '그 나물에 그 밥', 즉 안봐도 되는 이미지 때문"이라며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봐달라고 하기 전에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야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보라고 하면 관객들이 응답할리가 없지 않나. 이게 바로 한국영화의 현주소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