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감독 연출
사제지간이면서도 서로를 넘어서야 했던 두 사람, 조훈현과 이창호. 영화 '승부'는 경기의 기록을 넘어, 인간관계와 집념의 치열함을 응축한 ‘한 수’를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는 종종 ‘승부’라는 말을 단순한 결과로만 기억하지만, 이 영화는 그 단어의 무게를 다시 묻는다. 관계와 선택, 바둑판 위에 쌓여가는 침묵과 한숨,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은 우리의 인생으로도 비유할 수 있다. 때로는 다 이긴 듯한 판에서도 작은 빈틈 하나로 패배가 찾아오고, 모든 게 끝난 것 같던 순간에도 끝내 살아남아 승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처럼 삶과 닮은 바둑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놓치는지를 되짚는다.
영화는 세계를 제패하며 '바둑의 신'으로 불리던 조훈현(이병헌 분)의 이야기로시작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가 높았던 조훈현 앞에 소년 이창호(김강훈/유아인 분)이 등장한다. 조훈현은 어린 나이에도 범상치 않은 바둑 재능을 가진 이창호는 제자로 들인다.
소년 이창호는 어려서부터 바둑에 대한 칭찬으로 자신감이 올라있지만 조훈현은 엄격하게 가르치며 기본에 충실한다. 조훈현의 훈련을 받으며 청년으로 자란 이창호는 어린 시절의 패기는 사라졌지만 묵묵히 자신만의 바둑을 두기 위해 정진한다. 조훈현이 화려한 감각으로 공격에 집중한다면, 이창호는 지지 않을 수를 둔다. 사람들은 이창호를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나아간다. 그리고 한 바둑 경기의 결승전에서 스승 조훈현과 맞붙게 됐다.
결과는 조훈현의 패배였다. 제자 이창호에게 연이어 패하며, 조훈현은 더 이상 그와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고 판단한다. 승리하고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제자의 표정, 그리고 패배감에 잠식된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며, 두 사람 사이에는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균열이 생긴다. 자신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바닥을 치자 방황을 하던 조훈현이지만, 이제 도전자가 되어 이창호를 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간다.
'승부'는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있던 작품이었다. 2020년 크랭크인, 이듬해 촬영을 완료했으나 2023년 2월 주연 배우 유아인이 마약 투약 혐의가 불거지며 개봉이 연기됐다. 넷플릭스가 공개를 검토했으나 결국 엇갈렸고 바이포엠이 배급을 맡으면서 극장에서 약 5년 만에 선보이게 됐다. 보통 리스크가 있는 배우의 분량을 덜어내는 선택을 하긴 하지만, '승부'는 유아인의 분량을 그대로 살렸다. 영화를 관람하면 유아인을 편집하지 못한 김형주 감독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는 역시나 빈틈없이 맞물린다. 이병헌은 무너져가는 절대자의 감정 선과 노련함을 교차시키며, 극 전체를 단단히 붙잡고 간다. 이창호의 성장 서사와 함께 국내에서 연기력 만큼은 견줄 자가 없는 이병헌이라는 배우 앞에서 유아인은 이창호 그 자체로 머문다. 두 배우의 시너지는 이 영화가 단순한 전기 영화에 머물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다.
'승부'의 또 하나의 미덕은 바둑이라는 정적인 경기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긴장감을 끌어낸다. 바둑알을 놓는 소리, 눈빛과 손끝의 미세한 떨림, 수읽기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리듬까지, 감독은 마치 격투 장면을 연출하듯 두 사람의 대국을 설계했다. 침묵은 이 영화의 대사이고, 시선은 공격이자 방어다.
영화는 실존 인물은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기 보다, 순서를 재배치하며 극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두 사람의 실제 첫 대결은 제28기 최고위전으로, 조훈현의 반집 승리로 끝나지만, 첫 패배부터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패배하는 설정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스승이 제자에게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의 충격과 감정선을 극대화하고, 이후의 관계 변화에 설득력을 더한다.
결국 바둑은 소재일 뿐, 영화는 그 안에 담긴 인생과 관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다. 수없이 오가던 수는 하나의 선택이 되고, 침묵은 감정이 되며, 승패를 통해 단단해져가는 삶의 모양이 드러난다. 두 천재는 결국 서로의 거울이자, 서로가 넘어야 할 마지막 시험지였다. 26일 개봉. 러닝타임 1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