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車관세 칼 휘두른 트럼프 앞에…정부 대신 나선 현대차 정의선
상대 의도 파악…트럼프 마음 움직인 31조 대미 투자
정의선, 적도 껴안는 겸손과 굽힘…상대 설득하는 '진정성 있는 협상가'
'수출 효자' 품목 자동차…정부도 총력 다해야
'뼛속까지 장사꾼'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협상의 대가다. 거래의 달인이자, 야비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수입되는 자동차에 25%에 관세를 내라"고 한다. 통상 물건을 구매하는 쪽이 '갑'이고 파는 쪽이 '을'이라면, 미국은 '갑'이고 현대차는 '을'이다. 국력 역시 우리나라보다는 미국이 절대 우위다.
특히 대미 수출 비중이 큰 자동차는 품목별 관세가 부과될 경우, 기업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진 현대차가 미국산보다 10~20%가량 저렴했는데, 관세가 부과되면 오히려 더 비싸져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기업은 존립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해 판매한 자동차 4대 중 1대는 미국에서 팔렸다. 이러면 현실적으로 대등한 협상이 어렵다. 정부 리더십이 공백인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렇게 혈혈단신으로 '거대한 갑' 앞에 섰다. 불리한 위치에선 협상보다 주로 상대를 설득하는 쪽에 무게를 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간파하고 반전시키는 협상력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주위의 우려와 달리, 시종 완벽하게 상황을 장악했다.
정 회장이 백악관에서 미국에 2028년까지 4년간 210억 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현대는 대단한 기업"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현대차가 미국에서 철강을 생산하고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면, 관세를 낼 필요가 없다"며 화답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한국이 관세를 피하거나 적어도 다른 국가보다 낮은 관세를 부과받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마치 고려 초 외교전략가 서희와 거란 적장 소손녕의 담판이 떠오른다. 이 담판에서 서희는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한 거란의 의도가 송을 정복하는데 후방을 단속해야 한다는 의도가 있음을 간파했다. 서희는 고려의 이익뿐 아니라 거란의 이익도 보장하는 안을 내놨고, 소손녕은 이를 받아들였다. 객관적인 힘의 우열을 뒤집고 을이 갑에게, 약소국이 강대국에 협상 우위를 차지한 이유다.
25% 車관세 칼 휘두른 트럼프 앞에…정부 대신 나선 현대차 정의선
정 회장 역시 직접 미국을 방문해 대규모 투자라는 화끈한 선물 카드를 내밀어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끌어냈다. 고관세 압박을 통해 자국 제조업을 육성하고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충족시켜 주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백악관이 '트럼프 관세 정책'의 성공 사례로 정 회장을 부른 건 당연하다. 미국 백악관에서 대규모 투자 발표 행사를 연 것은 현대차그룹이 한국 기업 중 최초다.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정 회장의 자세도 눈에 띈다. 그는 지금 정치지도자들에게선 찾기 힘든 겸손·배려·소통 같은 협상술의 덕목을 보여줬다. 백악관 루스벨트룸에 도열해 있던 정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자 깍듯이 인사하고 이후 4분여의 발표 내내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겸손과 배려는 상대의 존중을 부른다.
그는 지난해 경기도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처음으로 공개 회동한 도요다 아키오 일본 도요타자동차그룹 회장 앞에서도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많이 배우려고 합니다"고 자신을 낮추기를 서슴지 않았다. 정 회장이 스스로 '약자'로 표현하면서 몸을 낮춘 데 대해 아키오 회장은 경쟁자인 현대차를 강자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정 회장은 파리올림픽에서도 전 종목을 석권한 한국 양궁팀의 '숨은 주역'으로 협회장인 자신이 평가받자 "선수들이 워낙 잘해서 제가 거기에 묻어서 가고 있는데 운이 좋은 것 같다"고 양궁 선수들을 배려했다. 상대방의 심경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표현과 진정성이 공감될 때 마음은 움직인다.
정의선, 적도 껴안는 겸손과 굽힘…트럼프 마음 움직인 31조 대미 투자
지금까지의 과정을 볼 때 정 회장은 '진정성 있는 협상가'다. 메신저가 신뢰를 얻으면 메시지가 설득력을 갖게 되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파토스(상대에 대한 공감)와 로고스(메시지의 논리), 에토스(전달자의 진정성)가 필요한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냐는 점, 즉 에토스"라고 했다.
실제 그는 미국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yundai Motor Group Metaplant America) 준공식에 참석해 "이틀 전 백악관에 가서 트럼프 대통령과 새롭고 더 큰 투자를 발표하게 돼 큰 영광이었다"면서 "현대차그룹은 단지 공장을 짓기 위해 이곳에 온 곳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기 위해 왔다"고 끝까지 진정성을 담으려 노력했다.
이날 행사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 관세 25% 부과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자동차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며, 다음 달 2일부터 발효돼 3일 수입 분부터 관세가 적용된다. 이제 우리 정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협상장에 나서야 할 때다.
'수출 효자' 품목 자동차…정부, 총력 다해야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생존을 위해 늘 상대국과 협상해야 한다. 어쩌면 정의선 회장이 우리 정부가 마무리할 거래를 위한 테이블을 차린 셈이다. 그 덕에 우리 정부는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게 됐다.
"관세라는 것은 국가 대 국가 문제이기 때문에 한 기업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 관세 정책이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만약에 (현대차의 현지 투자가) 관세에 조금 좋은 영향이 있다면 저희로서는 굉장히 노력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처럼 우리나라와 미국의 자동차 관세 협상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길 희망한다.
작년 우리나라의 대미 자동차 수출 규모는 347억4400만달러(약 51조원)에 달해 전체 자동차 수출 규모(707억8900만 달러)의 절반( 49.1%)을 차지했다. 국익 차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