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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머무는 곳 [조남대의 은퇴일기(70)]


입력 2025.04.08 14:08 수정 2025.04.08 14:08        데스크 (desk@dailian.co.kr)

마흔한 해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왔다.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2월의 끝자락 우리는 또 한 번의 여정을 꿈꾼다. 결혼기념일이면 어김없이 떠나는 여행이 우리 부부의 오랜 약속이 되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라 가까우면서도 아직 들르지 않은 곳을 찾다가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지명만으로도 그윽한 향기가 날 것 같아 마음이 먼저 앞선다.


정지용 시인 생가와 황소를 타고 있는 소년 동상 ⓒ

옥천 구읍(舊邑)으로 들어서면 어린 시절 고향을 찾아온 듯한 정겨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정지용 문학관과 육영수 여사 생가로 향하는 길은 ‘향수로’라 부른다. 왜 향수로일까. 정지용 생가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면 얼룩박이 황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소년이 눈에 들어오고, 검은 대리석에 새겨진 ‘향수’ 시비가 반긴다. 문학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동원과 박인수가 불러, 온 국민에게 고향을 그리게 하는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하며 따라 읊조리게 한다. 뇌리에는 고향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달려간다. 동무들과 뒷산에 소 풀어 놓고 해 저문 줄도 모르고 놀다가 소를 잃고 마을 사람들이 온 산에 불을 밝혀 헤매던 추억이 피어오른다.


생가 안에 세워진 향수 노래비 ⓒ
생가 주변 마을 벽에 그려진 벽화 ⓒ

생가 옆 실개천 주변 주택의 담은 향수를 주제로 한 벽화로 가득하다. 박두진, 정호승, 나태주와 같은 역대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의 시가 붙어 있다. 내 시도 언젠가 저 벽에 걸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부러움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옥천이라는 곳은 ‘향수’라는 시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향수마을, 향수택시, 향수정원, 향수산림과 같이 시의 향기로 가득한 고장이다. 요즈음 트로트가 한창 유행이다. 노래뿐 아니라 가사 한 줄, 한 줄이 마음을 흔드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편의 시가 많은 사람에게 이 고장을 그리워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정지용 시인이 남긴 향기는 옥천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지 않을까.


아흔아홉칸으로 지어진 육영수 여사 생가 ⓒ

문학관을 지나면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나타난다. 아흔아홉 칸의 양반 가옥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 모습을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조선 시대 세 명의 정승이 이어 살았던 사대부 가옥을 1918년 아버지가 매입하여 육 여사가 태어나고 결혼 전까지 살았다. 서거 후 세월의 흐름 속에 방치되어 철거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옥천군이 대지를 기부받아 고증을 거처 2011년에 삼천 평의 터에 복원했다. 이곳에서 스물댓 명의 식구와 일꾼들을 포함하여 오십여 명이 함께 생활했다니 어림잡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혼란 속에서도 동네의 가옥들이 불타기도 했지만 육 여사의 고향 집만은 그대로였다는 것은 평소에 베풀었던 따뜻한 정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향기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줄의 박정희 소령과 육영수 여사 ⓒ

육 여사는 이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올 때 비가 와서 하인이 우산을 가져다주었지만, 옷이 흠뻑 젖은 채로 귀가했다.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친구 두세 명과 우산을 쓰고 오면 다른 친구들이 서운해할까 봐 비를 맞으며 왔다고 한다. 깊은 배려심과 따뜻한 마음씨는 그녀의 삶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유한 가문의 수많은 혼처를 마다하고, 군화 끈을 묶는 박정희 소령 뒷모습이 마음에 들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삶의 동반자로 결정했다. 영부인으로 지내는 십 년 동안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자애로운 사랑을 꽃피웠다.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에게는 어머니의 품처럼 사랑스럽고 따뜻한 위로를, 국민에게는 검소하고 품위 있는 이미지를 선사했다. 안타깝게도 비운의 총탄에 쓰러졌지만, 그녀가 남긴 자애와 헌신은 한 떨기 고결한 백합처럼 피어나 국민의 마음속에 은은한 향기로 남아 있다.

둔주봉에서 바라본 동서가 바뀐 한반도 지형 ⓒ

옥천에는 금강이 흐르고 대청호가 있다. 강이 흐르면서 빚어낸 절경은 ‘한반도지형’과 ‘부소담악’을 탄생시켰다. 한반도지형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몇 군데 있지만, 둔주봉에 오르면 우리나라 지도의 동쪽과 서쪽이 바뀐 형태를 볼 수 있다. 금강이 굽이쳐 흐르며 만들어 낸 신비로운 모습이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은은한 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송홧가루가 날리는 봄이면 더욱 짙다.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노오란 송홧가루를 활용해 만든 떡과 쿠키나 빵을 입안에 머금으면 솔향이 온몸을 감돈다.

부소담악의 아름다운 풍경 ⓒ

부소담악은 사계절 내내 신비로운 비경을 품은 채 길손의 발길을 붙든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으로 이어진 길이가 무려 칠백 미터에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세월을 이겨낸 노송들이 푸르름을 더한다. 조선 시대 대학자 송시열이 소금강이라고 칭송했으니 그 절경이 어떠하랴. 본디 우뚝한 산이었으나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물이 차올라 호수를 감싼 바위 병풍이 되었다. 장엄한 그림을 제대로 눈에 담으려 추소정에 오르자 용이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형상이 펼쳐진다. 날카롭게 솟은 절벽 따라 빽빽이 서 있는 소나무들은 세월의 증인처럼 서 있다. 옛 선비들이 정자에 모여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짙게 배어든 솔 향기와 문인의 글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이 선경이 아닐는지.


부소담악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추소정 ⓒ

옥천 방문을 통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사람과 자연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천리향보다 인품의 향기가 더 멀리 간다.’라는 성현들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널리 퍼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마음속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삶의 흔적을 남기는 따뜻한 숨결이다. 정지용의 시와 육영수 여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금강과 부소담악의 솔 향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옥천에서 고향의 향수까지 듬뿍 담아 올 수 있었으니 여행이 끝난 후에도 가슴속에는 향기가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을까.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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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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