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손보사 비상위험준비금 4조 돌파…올해 들어서만 3000억↑
새 규제 시행 시 재무 부담 키우는 악재 될 수도…이중고 우려
국내 3대 손해보험사들이 예기치 못한 대규모 손실에 대비해 쌓아 둔 돈이 올해 들어서만 3000억원 넘게 불어나며 4조원을 훌쩍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하 코로나19) 충격으로 금융 시장의 불안이 유래 없이 커진 가운데 이 같은 선제 조치는 위기 시 요긴한 방파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으로 시행될 새로운 규제 아래서 이런 비상금이 도리어 보험사의 기초체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돌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가뜩이나 자본력을 둘러싼 고민이 깊어지고 있던 손해보험업계의 앞길에 또 다른 암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삼성화재·현대해상·DB손해보험 등 국내 3개 손보사들이 적립한 비상위험준비금은 총 4조2038억원으로 지난해 말(3조8850억원) 대비 8.2%(3188억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비상위험준비금은 표현 그대로 예상하기 힘든 비상사태에 대비해 쌓고 있는 준비금이다. 재난 등 예측을 뛰어 넘는 불의의 거대 손실에 대응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 성격을 갖는 자금으로, 일반적인 사고로 인한 보험금 지급을 위해 손보사가 쌓아 둔 책임준비금과 별도로 구분돼 있는 항목이다.
손보사별로 보면 우선 삼성화재의 비상위험준비금이 같은 기간 2조782억원에서 2조2326억원으로 7.4%(1544억원) 증가하며 손보업계 최대를 유지했다. DB손해보험 역시 9322억원에서 1조236억원으로, 현대해상도 8746억원에서 9476억원으로 각각 9.8%(914억원)와 8.3%(730억원)씩 해당 금액이 늘었다.
이처럼 미리 비상위험준비금을 많이 적립해 두면 손보사로서는 혹시 모를 악재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금융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여유 자금은 손보사의 안전판을 한층 강화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금리와 증시의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 대형 보험 사고까지 터질 경우 손보사들은 이중고가 불가피한데, 이 때 충분한 비상위험준비금이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어서다.
문제는 향후 비상위험준비금이 오히려 손보사의 자본 건전성을 위협하는 사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이는 금융당국이 도입하려 하는 신지급여력제도(K-ICS)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2023년 보험부채 시가평가를 골자로 하는 국제회계기준(IFRS17) 시행과 함께 국내 보험업계에 적용하기 위한 K-ICS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K-ICS의 틀을 잡는 과정에서 보험사의 비상위험준비금이 회계 상 기본자본이 아닌 보완자본으로 분류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렇게 되면 비상위험준비금이 많은 보험사는 자본력 약화에 직면할 수 있다. K-ICS 기본 방침 상 보완자본은 보험사가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요구자본의 절반까지만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다. 현재 요구자본의 상당 부분을 비상위험준비금으로 적립하고 있는 보험사로서는 규제로 인해 자본이 쪼그라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보험사의 재무 부담을 키우는 IFRS17를 앞두고 자본력이 떨어지고 있는 손보사들 입장에서 이 같은 규제는 새로운 걱정거리일 수밖에 없다. 손보업계의 올해 1분기 말 평균 지급여력(RBC) 비율은 241.9%로 1년 전(256.9%)보다 15.0%나 낮아진 실정이다. RBC 비율은 보험사가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제 때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숫자로, 보험사의 자산 건전성을 평가하는 대표 지표다.
금융권 관계자는 "손보사들이 대형사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은 이른바 보험사들이 드는 보험인 재보험이 기본이지만, 이와 함께 자체적인 대응력을 키우기 위한 비상위험준비금도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며 "리스크 관리를 위한 보험사의 노력이 거꾸로 자본력 약화 요인이 되는 규제는 취지 상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