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PF대출 채무보증 2013년 6조→올해 25조
레고랜드발 자금경색 우려에 정책자금 대거 투입
“활황기 사업 늘려 수익 내고 하락기 혈세로 막아”
올 한 해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 등 글로벌 긴축 기조 강화로 국내외 증시가 침체되면서 증권사들이 어려움을 겪어 왔다. 여기에 최근 레고랜드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그야말로 업친데 덮친격, 설상가상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불확실성 확대 속에서 리스크 증대가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위기의 파고를 헤처가려는 증권업계의 모습을 살펴본다.<편집자주>
금융당국이 레고랜드 사태로 확산된 증권사들의 자금 경색을 풀기 위해 유동성 공급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혈세를 동원해 이들의 부실 위험을 막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앞선 초저금리·부동산 활황기에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무리하게 늘려 이익을 올린 일부 증권사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국증권금융은 지난달 26일부터 자금이 급히 필요한 증권사를 대상으로 한 환매조건부채권(RP)과 증권담보대출을 통해 3조원 이상의 자금 지원을 개시했다.
산업은행 역시 10조원 규모의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중 우선 2조원을 증권사 CP 매입에 투입키로 했다. 증권사들에 대한 유동성 공급과 별도로 20조원 규모 채권시장 안정 펀드(채안펀드)는 지난달 24일부터 회사채·CP 매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RP매매 대상증권을 확대하고 증권금융 등에 대해 6조원 규모의 RP매입을 실시하는 등 단기금융시장 안정화 지원에 나섰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업계는 레고랜드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증권사들이 유동성을 일부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금융당국은 대형 증권사들이 자금을 모아 중소형 증권사들을 지원하는 ‘제2의 채안펀드’를 조성하는 방안도 협의 중이다. 회사 별로 500억∼1500억원을 출자해 최대 1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 중소형 증권사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등을 매입해주는 게 골자다.
미래에셋증권·메리츠증권·삼성증권·신한투자증권·키움증권·하나증권·한국투자증권·KB증권·NH투자증권 등 9개 대형 증권사는 증권사가 보유한 ABCP 물량을 업계 차원에서 소화될 수 있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지난달 27일 합의했다.
반면 일부 증권사들이 부동산PF 영업을 무리하게 늘려온 가운데 정책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주택 시장이 활황이던 지난 몇 년 동안 PF는 증권사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다. 증권사들은 부동산 시행사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ABCP나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을 발행해 신용보강을 하고 이에 대한 이자 수익이나 수수료를 챙겨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권(은행·보험·여전·저축은행·증권)의 PF 대출 잔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112조2000억원이다. 부동산 PF 부실 사태가 발생한 지난 2013년 말 35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PF 대출 잔액은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70조원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증권사 PF 대출 채무보증(신용보강) 규모가 5조9000억원에서 24조9000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이재우 한국신용평가 수석 연구원은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저금리기조와 풍부한 유동성 속에서 부동산 경기는 크게 상승했고 증권을 비롯한 금융권에서도 부동산금융을 통해 높은 이익을 향유했다”며 “이제는 인플레이션과 높은 금리라는 비용을 치를 때가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들어 시장에서는 금리·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PF 대출이 뇌관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레고랜드 PF ABCP 채무불이행 사태가 부동산 PF 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는 그동안 과도하게 PF 대출을 늘린 증권사들에게 대형 부실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특히 전체 자기자본 대비 PF대출과 사업 초기 브리지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증권사일수록 부실 우려가 커졌다. 브릿지론은 본 PF 전 시행사가 땅을 사고 회사를 운영할 자금을 빌려주는 단기 대출이다.
그동안 대형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부동산 PF를 늘리면서 시장을 키운 가운데 중소형 증권사는 위험도가 높지만 높은 수익을 노릴 수 있는 브릿지론이나 중·후순위 부동산 PF에 적극 투자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국내 주요 증권사 24곳의 PF대출과 브리지론 비중은 자기자본의 39% 수준을 차지했다. 국내 주요 증권사 24곳의 평균은 39%로 대형사는 이를 밑도는 37% 수준을 나타냈지만 중형사는 이 비중이 47%, 소형사는 49%에 이른다.
증권업계 전반의 책임론이 부각됐지만 자금 지원을 두고는 입장이 갈리는 모습이다. 대형사들이 중소형 증권사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 출자를 승인하는 것은 향후 배임 소지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맞서고 있다. 실제 일부 증권사들은 앞선 제2 채안펀드 조성 회의에서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활황기에는 사업을 확장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결국 시장이 하락기에 접어들어 위기가 오자 혈세까지 거둬들이고 있는 것 아니냐”라며 “업계가 위험관리를 소홀히 한 문제가 있지만 그동안 부실에 대비해온 일부 증권사들 입장에선 경쟁사를 도우라고 하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