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우리가 어떤 문화콘텐츠를 볼 때 중시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단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무엇일까.
신선한 스토리와 쫀쫀한 플롯도 중요하고,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프레임 속 아름다움이라 할 미장센도 중요하고, 배우의 연기력도 중요하고, 이 모두를 아우러내는 연출력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서슴지 않고 배우를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요소가 여러 여건에 의해 불충분할 때 그것을 능히 메워낼 가능성이 배우에게 있다. 둘째는, 다른 요소가 기본 이상으로 만족스럽거나 훌륭할 때 바로 그 충족감이 우리에게 생생히 배달될 수 있는가도 배우가 크게 좌우한다.
단순하게 말해도 작품을 볼지 말지의 선택에, 보는 동안 몰입과 즐거움의 정도에, 보고 나서 장면과 작품에 관한 추억에 배우가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해서 비주얼화 된 콘텐츠를 볼 때 작가에 의한 이야기 구성, 제작 스태프에 의한 미장센, 연출 감독에 의한 연출력은 작품을 채운 공기처럼 바람처럼 즐기고 그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를 도드라지게 만끽한다.
영화 ‘대가족’(감독 양우석, 제작 게니우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두 번째 관람 때 더욱 그랬다. ‘대가족’의 배우들은 다양한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
줄 서는 만둣가게 평만옥의 사장 함무옥 역의 김윤석은 만두 하나를 빚어도 50년 해온 일처럼 자연스러운 ‘연기 마스터’의 최고 연기를 관찰하는 즐거움을 준다. 흥남부두에서 하나뿐인 여자 동생을 잃고 혈혈단신 남에 와 다복한 가족 꾸리는 게 유일한 꿈이었으나 아내는 저세상으로 일찍 떠나고 의대에 보낸 자랑스러운 아들은 탈속하여 스님이 되어, 자신이 죽어도 제사상에 술 한잔 따라줄 후손이 없어 적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산다. 수백억 빌딩이 몇 개여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무상을 실감 나게 전한다.
워낙 현실 연기,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 잘하는 배우 박수영이지만 김윤석만 만나면 더 돋보인다. ‘완득이’에서는 눈물을 쏙 빼더니 ‘대가족’에서는 배꼽 빼는 4번 타자로 활약한다. 세속에서 프로파일러였고 지금은 주지 스님(이승기 분)을 시봉하는 승려 인행 역을 맡았는데, 두 손 다친 설정으로 어디까지 웃길 수 있는지 끝을 보여 준다.
메소드 연기의 최고봉 김윤석의 아들 문석으로, 박수영과 딱 붙어 다니는 무애 스님으로 분하며 두 선배 사이에서 호흡을 맞춰선지 이승기는 배우 인생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여러 논란 속에 도리어 성숙한 듯 안정감 있고 모난 데 없는 캐릭터 표현으로 눈길을 끈다.
눈길 끌기로는 어린이 배우 김시우와 문채나가 일등이다. 집안에 아이가 있으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듯 아무런 평가를 무장해제 시키는 어여쁨을 두 배우 모두 지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인데, 김시우는 이미 스님이 된 문석을 ‘아빠’라며 찾아온 민석이를 맡아 애어른 같은 묵직함 그래서 더 안쓰러운 아이의 면모를 차분하게 연기한다. 문채나는 어린이 배우라 해도 배우에게 있어 유리한 고지일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또박또박 말만 해도 오물오물 먹기만 해도 주목하게 한다.
스스로 키운 배우 그릇의 크기보다 작은 분량의 배역을 맡아도 최선의 연기로 박수를 부르는 배우들도 ‘대가족’의 매력지수를 높인다. 문석의 대학 시절 여자친구이자 평생 친구인 한가연 역의 강한나, 문석의 절친이자 한가연의 남편을 연기한 심희섭의 연기는 통통 튀게 맛있다. 이야기 실타래를 엉키게 해 오해의 포인트가 되는 여래반점 배달원의 서범준은 외모와 캐릭터의 급격한 변화로 재미를 준다.
또, 민석과 민석이 머무는 보육원의 원장 수녀 역의 길해연과 젊은 수녀 역 이지혜의 연기는 따스하다, 가연의 아버지이자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최고의 난임 전문 산부인과 의사 역의 최무성, 무애가 존경하는 큰스님 역의 이순재와 적정스님 역의 이재용은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캐릭터의 힘이 커야 하는 배역에는 에너지 좋은 배우가 캐스팅돼야 함을 확인시킨다.
배우들이 선사하는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보며 감탄도 하고 하하하 웃기도 하고 행복에 겹다가 엄지를 세우는 일, 대체하기 힘든 만족감이다.
다시 한번 개인적 의견이겠으나, ‘대가족’을 보며 가장 큰 즐거움을 만끽한 배우는 김성령이다. 두 번째 관람을 선택한 이유도 김성령의 연기를 더욱 세밀히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김성령은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처음 만난 셀럽이었다. 배우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건 1991년의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가 아니었고, 2007년 작 영화 ‘궁녀’가 출발이었고. 화장기 지운 모습으로 법무법인 사무장으로 분한 ‘의뢰인’(2011) 때부터 연기의 진심이 크게 와닿았다.
그 뒤 꾸준히 크고 작은 역으로 영화에 등장했으나 웬만해서는 가려지지 않는 엄청난 미모, 성대가 살짝 붙었다 떨어지는 듯한 발화가 주는 불안감이 각고의 노력으로 점점 좋아지는 연기력을 아쉽게도 가렸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대가족’에서 보여준 연기는 보는 이의 시야를 가리는 미모나 발성을 애써 거둬내고 애써 본연의 연기만 평가하려는 노력을 필요 없게 한다.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배우 김성령의 그릇이 크고 넓어졌을 뿐 아니라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채색됐음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평만옥’의 실질적 안주인 역할을 감당하기에 넉넉하고, 연기 마스터 김윤석과 동등한 ‘대가족’의 공동 주연으로서 손색이 없고,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을 단번에 수긍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배우 김성령의 아름다운 성장이다. 배우가 주는 여러 만족 중에서도 스스로 자기를 극복한 성장이 주는 기쁨은 내 일처럼 뿌듯해 더욱 즐겁다.
김성령의 영과 육을 빌어 태어난 방정화는 처음엔 ‘대가족’의 공기처럼 조용히 존재한다. 무옥의 절대적 지지자이자 보호자처럼 보이던 정화는 이제 점차 공기를 휘저어 바람을 일으키고, 결자해지하듯 무옥과 함께 해결의 역사를 만든다.
김윤석, 무옥을 향한 연심도 더할 나위 없이 ‘쿨하고’ 멋지게 대차다. 김성령-김윤석, 김윤석-김성령,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케미스트리로 예상치 못한 ‘달달함’과 하모니가 피어났음을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젊은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지, 청춘을 넘어섰다면 지금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해답이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