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中 기술 굴기…내년 복합 위기 속 '새해 메시지' 주목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 보다 녹록치 않다."(11월 항소심 최후진술)
"치열한 승부근성과 절박함으로 역사를 만들자."(7월 인도 뭄바이)
"모두가 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잘 해내고 아무도 못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먼저 해내자."(6월 미국)
새해 취임 4년차를 맞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신년 메시지를 내놓을지 관심이다. 지난 1년간 이 회장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된 반도체 뿐 아니라 건설, 에너지, 5G, 바이오, 배터리 등 다양한 첨단 기술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럼에도 반도체는 트럼프 2기 출범, 중국의 저가 제품 공세 이슈가 맞물리며 또 다른 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다른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의 경우 글로벌 경제 불황으로 생산 목표를 하향 조정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지속되는 불확실성 속 이 회장이 2025년을 맞아 새 경영 비전을 제시, '뉴삼성'을 고도화할지 주목된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재계는 올해 쉴틈 없이 글로벌 강행군을 펼친 이 회장이 복합 위기를 돌파할 신경영 화두를 제시할 지 주목하고 있다.
이 회장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글로벌 정상들과 만남을 갖고, 여러 삼성 계열사 사업장 및 협력사들을 찾아 격려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였다. 한국을 찾은 정·재계 관계자들과의 만남도 주선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도 놓치지 않았다.
올해 첫 해외 출장지로 이 회장은 지난 2월 말레이시아 스름반을 찾아 배터리 사업을 점검했다. 그는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말고 과감한 도전으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4월에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독점 제조사 ASML의 EUV 장비에 광학 시스템을 독점 공급하는 자이스(ZEISS) CEO를 만났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성패는 초미세공정에 달려 있으며, 초미세공정을 위해서는 EUV 장비가 필수적이다. 삼성이 ASML과 자이스와의 협력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 6월 2주간 미국 강행군을 불사하며 AI 등 첨단 분야 ‘우군’ 확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기간 그는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앤디 재시 아마존 CEO,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 겸 CEO,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CEO 등과 연쇄 회동하며 첨단 분야에서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협력 모델 구축에 힘을 쏟았다.
파리 올림픽이 열린 7월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피터 베닝크 전 ASML CEO 등 반도체·IT(정보통신)·자동차 산업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인들과 릴레이 미팅을 갖고 중요 비즈니스 현안 및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이 기간 시상대 위에 오른 선수들이 영광의 순간을 직접 촬영하는 삼성의 ‘빅토리 셀피’가 전세계 전파를 타며 갤럭시 Z시리즈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숨가쁘게 달린 그의 행보를 정리하면 ▲글로벌 네트워킹 ▲초격차 기술 투자 ▲인재 육성 ▲신사업 공략 ▲문화 발전 기여 등으로 요약된다. 이는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 큰 줄기와도 맞닿아 있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 혁신을 위해 삼성은 성능 개선, 생산 공정 최적화, 수율(양품 비율) 향상을 달성해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발맞춰 자이스도 2026년까지 480억원을 투자해 한국에 R&D(연구개발) 센터를 구축할 방침으로, 삼성의 기술 혁신은 한층 가팔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스마트폰에서도 삼성은 올해 초 세계 최초의 AI 스마트폰인 '갤럭시S24'를 출시하며 AI폰 선두주자 입지를 다졌다. 글로벌 통신 업계는 AI가 향후 10년 산업 발전을 촉진할 주체가 될 것으로 전망하며 삼성의 '갤럭시 AI'의 향후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이 회장의 혁신 주문과 삼성 사업부의 잇따른 성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환경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 내수 침체, 러-우 등 전쟁 리스크는 글로벌 전체 수요를 끌어내리며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해외 기업 보조금 중단·축소, 관세 전쟁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같은 우려가 확산해 AI 서버 외 주요 응용처인 PC, 스마트폰, 일반 서버 산업이 정체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은 반도체 성장세에 큰 걸림돌이다.
시레 미 제재 돌파구로 중국은 저가 반도체를 쏟아내며 글로벌 반도체 단가를 끌어내리고 있고 미국은 삼성·SK가 강점을 가진 HBM(고대역폭메모리)마저 수출통제에 포함하기로 국내 기업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 제재, 중국 반도체 굴기, AI 반도체 투자 등 긍정·부정 이슈가 한 데 얽히면서 반도체 산업은 AI와 비(非)AI 부문을 중심으로 수요 양극화가 전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DDR5, HBM 등 고부가 제품 수요는 견조하나, 그 외 레거시 제품 채용은 외면을 받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부가 제품 개발 타이밍을 놓치면서 삼성 반도체 본원 경쟁력이 약화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쌓이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HBM3E 8단과 12단을 양산중이나, 엔비디아향 공급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팹리스)-TSMC(파운드리)-SK(HBM) 체제가 당분간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은 반도체(DS) 사업부장 3명 중 2명을 전격 교체하는 초강수 인사를 단행, 반도체 기술 경쟁력 강화를 선언했다. 메모리 사업부는 대표이사 직할체제로 전환하고 파운드리 수장도 교체해 공정기술 혁신, 비즈니스 경쟁력을 반드시 제고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다른 주력 사업인 스마트포 전망도 녹록치 않다. 글로벌 경제 불황 심화 등으로 내년 선보일 신제품 갤럭시 생산 규모가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내년 스마트폰 생산량을 올해 목표치 2억5000만대 보다 2000만대 축소한 2억3000만대로 책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은 스마트폰 시장 성장세가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이 올해 12억1000만대, 내년 12억5000만대로 성장세가 3.7%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PC 교체 수요도 내년 5.0% 내외 성장이 점쳐진다.
제조사들이 AI PC 등 신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는 있지만 가격, 호환성 등의 이유로 눈에 띄는 수요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2022년 당시 13.8%, 2021년 11.3% 성장세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저성장 기조 속 최근 불거진 계엄 사태·탄핵 정국으로 환율 상승, 자금시장 경색 등 국내 경제·산업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또 다른 변수다. 뒤숭숭한 대내외 분위기 속 삼성 조직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글로벌 행보와 조직 혁신에 역량을 쏟아온 이 회장이 이같은 초유의 위기 속 반도체·디스플레이·모바일 등 주요 사업 영역에서 '초격차 기술 지위'를 이어갈 새 전략을 내놓을지 관심이다.
특히 그가 지난달 '부당합병'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발언한 '삼성 위기' 당시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업계는 그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열린 삼성전자 글로벌 전략회의에 모인 경영진들도 내년도 경기 전망을 보수적으로 보며 소비 여력이 단기간 내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삼성이 초일류 기업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경쟁사를 압도할 품질·차세대 제품 개발이 최선이다. 금융위기 못지않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기력에 빠진 그룹에 쇄신 목소리를 낼 역할도 요구된다. 이런 차원에서 이재용 회장이 '새로운 삼성' 구상안을 그룹 안팎에 전달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다만 형식 측면에서 신년사 보다는 사내용 메시지를 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등기이사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신년사 보다는,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도전 위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방식을 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와 별도로 이 회장이 책임경영을 내걸고 내년 등기이사로 복귀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신기술 투자, M&A(인수·합병), 지배구조 투명화 등 뉴삼성 기틀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는 이 회장이 이사회 멤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재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