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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100세 일기로 별세


입력 2024.12.30 08:18 수정 2024.12.30 08:18        김상도 기자 (sara0873@dailian.co.kr)

'실패한 대통령'서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으로 재평가

재임 중 주한미군 철수 압박, 퇴임 후 노벨평화상 수상

1차 북핵 위기 방북 김일성 주석 만나, 한반도 평화 중재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 EPA/ 연합뉴스

'세계 평화의 전도사'라고 불리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던 중 별세했다. 100세.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45분쯤 조지아주 고향 마을 플레이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재단이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과거 암 투병을 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겪었다. 지난해 2월에는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호스피스 완화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22년 10월 98번째 생일을 맞으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실업, 스테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 등과 같은 경제 문제에 대외 악재까지 겹치며 재임 기간 미국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재선에도 실패했지만, 퇴임 후 평화 해결사로 활약해 '가장 위대한 미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한반도와도 오랫동안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북·미 사이의 중재자로 나섰고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 화해를 도모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 조지아의 작은 마을인 플레인스에서 농부이자 사업가인 부친, 간호사인 모친 사이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 해군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했다.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전역 후 조지아로 돌아와 부친이 운영하던 농업 사업을 물려받았다. 이후 교육위원에 출마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선거에서 당선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함으로써 극적으로 의원직을 거머쥔 그는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선출됐다. 성공적으로 4년 임기를 마치고 1976년 11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꺾고 당선됐다.


출마 당시 유권자의 2%만 그의 이름을 알았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고 정치 경력도 일천했지만,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이 카터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집권한 카터는 서민적인 이미지를 앞세웠다. 외교 노선에서도 인권, 도덕 같은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재임 당시 경제 및 대외 악재가 줄을 이으며 고전했다. 1970년대 에너지 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인권을 앞세운 도덕주의 외교 정책도 발목을 잡은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2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교회에서 부인 로잘린 여사를 위한 추모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978년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노선은 공정함”이라며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긴 것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자국의 이익마저 내버리는 대통령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해 52명의 미국인을 444일간 인질로 삼자 이듬해 특공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나 정치적 자질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임기 말에는 2차 오일 쇼크,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 등을 겪으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결국 1980년 대선에서 '위대한 미국' 건설을 내건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하며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인물이 됐다.


특히 1977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3만명에 이르던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한국과의 악연도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향후 4~5년 내에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반발한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론이 일었고, ‘북한 군사력이 과소 평가됐다’는 국방부 정보 부서 보고서 등이 나오며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백지화됐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 등을 둘러싸고 박 전 대통령과 충돌한 1979년 6월 방한 당시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재임 기간 대표적 치적으로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리는 중동 평화협상 중재 성공이 꼽힌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역사적인 협정은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수십년간 이어져 온 갈등을 막고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업적이 더 빛을 발하며 ‘세계 평화 전도사’라고 불렸다. 퇴임 이듬해인 1982년 애틀랜타 에모리대 내에 세운 비영리기구인 카터재단(카터센터)을 바탕으로 평화·민주주의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서며 재임 기간 때보다 퇴임 후 더 빛나는 전직의 시대를 구가한 것이다.

그는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 질병 퇴치 등 인도주의 활동에 특히 자부심을 보였다. 2001년 방한해 충남 아산 등에서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4년 임기를 더 맡는 것과 카터 센터 중 하나를 고르라면 카터 센터를 택할 것”이라 강조했다.


1994년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차 북핵 위기' 때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 주석과 담판, 북미 협상의 물꼬를 트는 등 평화의 사절로 나섰다. 이후 미국인 억류 사안이 불거진 2010년 8월,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한 2011년 4월 등 총 3차례 방북을 했다.


이밖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섰다. 이런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노년기에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다. 2015년 8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가 그해 말 완치됐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합병증을 앓았으며 2019년에는 낙상으로 뇌 수술을 받기도 했다.


1946년 로잘린 여사와 결혼 한 그는 2021년 7월10일 결혼 75주년 기념식에서 평생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온 아내에게 "(결혼생활 내내 내게) 꼭 맞는 여성이 돼 줘서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로잘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 슬하에는 4자녀의 자녀가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생전 워싱턴DC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 플레인스에 있는 집 앞에 묻히고 싶다고 2006년 미 의회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김상도 기자 (sara0873@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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