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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화마(火魔)가 삼킨 수 천 년 생명…1대뿐인 헬기는 힘도 못 썼다


입력 2025.04.08 13:31 수정 2025.04.08 13:54        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환경부 기자단, 주왕산 산불 현장 찾아

실화로 시작한 화마 역대급 피해 남겨

한 대뿐인 헬기 연쇄 산불에 힘 못써

장비 보강 없으면 재난 반복할 수도

지난달 25일 산불로 훼손된 주왕산국립공원 모습. ⓒ환경부 공동취재단

목적지 근처에 이르자 버스 창밖으로 무너진 집들이 보였다. 그을림을 넘어 잿빛으로 변해버린 축사와 식당, 가정집을 지나 2~3분쯤 더 달린 버스는 ‘달기 약수터’ 주차장에 멈췄다.


달기 약수터는 예부터 철과 이온 성분이 풍부해 위장병과 심장병에 좋은 물로 알려진 곳이다. 유네스코(UNESCO) 지질 명소이지만 이날은 인기 관광지, 유네스코 지질 명소 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탄내였다. 눈앞에 전소된 식당(으로 추정되는)이 이번 화마(火魔)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불타 뼈대만 남은 소형 화물차도 주차장 한쪽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노란색 경계선(폴리스 라인)은 그날의 참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7일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산불 현장을 찾은 환경부 기자단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맡은 안호경 주왕산국립공원 사무소장은 그날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달 25일 산불로 전소된 주택 모습.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사방이 모두 불길이었습니다. 보통 산에 불이 나면 1시간에 2~3㎞ 속도로 번지는 데 그날은 7~8㎞ 속도로 옮겨 다닌 것 같아요. 바람이 얼마나 강했냐면, 미닫이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어요. 완전히 태풍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불덩이가 계곡을 뛰어넘어 다녔거든요.”


국립공원공단 설명으로는 지난 22일 경북 의성군에서 성묘객 실화로 발생한 산불은 안동시를 거쳐 사흘 만에 청송군 청송읍 월외리까지 옮겨붙었다. 주왕산국립공원 43㎞ 밖에서 일어난 산불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화점(불이 난 지점)과 화선(불이 일자로 이어진 구간)이 한 시간 동안 몇천 개에 달했어요. 주왕산, 청송 일대가 모두 마비됐죠. 전기와 수도도 다 끊겼고, 소방이나 경찰이 와도 불을 끄거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도깨비불처럼 하늘을 날아다닌 불덩어리는 피해도 ‘복불복’으로 안겼다. 불덩이를 맞은 집과 축사는 형체를 알 수 없도록 타버렸다. 반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덩이를 피한 집은 멀쩡했다.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지난달 25일 산불로 전소된 건물 모습.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주왕산국립공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너구마을(청송읍 월외리) 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15가구 19명이 사는 너구마을은 50대가 1명, 나머지 주민은 모두 60대 이상 고령이다.


25일 화마가 주왕산을 덮칠 때 너구마을은 불구덩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마을 이장 권성환 씨는 당시 빠르게 번지는 불길을 피해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 7명을 대피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영화에서 보는 허리케인 같은 불기둥이 사방에서 치솟았어요. 읍내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8㎞ 정도 되는데 1시간 만에 불이 날아왔거든요. 우선 주민들 대피가 먼저다 싶어 일단 차를 이용해서 내려보내고, 저는 30분쯤 뒤에 내려갔어요.” -권성환 너구마을 이장


마을에서 가장 늦게 떠난 권 씨는 읍내까지 가는 20여 분 동안 불기둥 터널을 뚫어야 했다. 좁은 계곡 양쪽에서 불이 붙은 터라 실제로 불과 불 사이를 지나야 했다. 출발 전 차량에 물을 끼얹은 게 그의 목숨을 살린 신의 한 수였다. 계곡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묘책이다.


지난달 25일 산불로 전소된 화물차 모습.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불행 중 다행으로 너구마을은 인명피해 없이 이번 화재를 견뎠다. 다만 평생 겪어보지 못한 화마의 위력에 주민들은 청송군 전체를 뒤덮은 냄새처럼 여전히 불안을 모두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주왕산국립공원에서만 3260ha의 산림이 불탔다. 청송군 전체 인명과 재산 피해는 사망자 4명, 중상자 1명, 주택 625동이 전소됐다.


한편, 이번 화재는 경북 의성군에서 성묘객 실화로 발생한 불이 주왕산까지 옮겨붙으며 발생했다. 시작은 단순 실수였지만 결과는 역대급 규모의 재난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초동 진화가 어려웠던 것은 봄 강우량 부족으로 나무가 말라 있었다는 점, 바람이 강했다는 점,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산불이 발생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진화 장비와 인력의 한계가 드러났다. 산이라는 지형적 특수성 탓에 헬기와 같은 대형 장비 없이는 주불을 진화하는 게 어려웠다.


참고로 국립공원공단이 보유한 진화 헬기는 한 대뿐이다. 옛 소련으로부터 1992년 차관 대신 받은 기종인데, 이마저 이번 주왕산 산불에는 쓰지 못했다. 지리산 산불이 민가로 옮겨 가자 이 지역에 먼저 투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안호경 소장은 “너무 강한 바람에 국립공원 요원들만으로는 (주왕산 산불) 주불을 끌 수 없었다”며 “헬기가 권역별로 한 대씩 총 서너 대 정도, 최소한 두 대라도 있었다면 보다 빨리 불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달 25일 산불로 훼손된 주왕산국립공원 모습. ⓒ환경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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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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