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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뭘 묻든 '정파적 응답'…깊어만 가는 국민분열


입력 2020.01.17 04:00 수정 2020.01.17 05:50        정도원 기자

추미애·윤석열 잘잘못 설문, 그저 정파적 판단과 동일

잘한 일은 잘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 해야 하는데

원수·아들 구분없이 적임 천거한 옛 사례에 비춰 민망

지난해 9월 2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사법적폐 청산 촛불문화제ⓒ 지난해 9월 2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사법적폐 청산 촛불문화제ⓒ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제후 평공(平公)이 조정의 공족대부 기해(祁奚)에게 "남양의 현령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좋겠느냐"고 물었다. 기해가 "해호(解狐)가 좋겠다"고 하자 진평공은 깜짝 놀랐다. "해호는 경의 원수가 아니냐. 어째서 해호를 천거하는 것이냐"는 진평공의 물음에, 기해는 태연히 "현령으로 누가 적임자인지를 물으셨을 뿐, 신과 원수지간인지를 묻지 않으셨다"고 답했다.


이후 조정의 사구(司寇)가 공석이 됐다. 진평공이 기해에게 "누가 좋겠느냐"고 묻자 기해는 "기오(祁午)가 좋겠다"고 답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진평공이 "아들이 아니냐"고 묻자, 기해는 "누가 사구에 적임인지를 물으셨지, 아들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셨다"고 답했다. 사기(史記) 진세가(晉世家)에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다.


내게 원수인지 아들인지를 묻지 않고, 오로지 적임인지 아닌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따지는 것이 요즘처럼 부질없어진 때가 동서고금에 또 있을까 싶다. 적임과 직무평가는 둘째치고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5000만 국민의 가슴 속에 서로에 대한 원한만 사무쳐, 그저 '원수'와 '아들' 두 부류만 남아버렸다.


여론조사에서 어떤 질문을 묻는지도 의미가 없어졌다. 남양의 현령을 묻든 조정의 사구를 묻든간에 그저 '원수'는 당장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할 자며, '아들'은 공명(功名)을 죽백(竹帛)에 아로새길 양신(良臣)이 되고 말았다.


데일리안은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에 의뢰해 지난 13~14일 국민의 여론을 물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 여부와 추미애 법무장관,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에 대한 긍정·부정평가를 설문했다. 질문은 세 가지였으되 답은 하나였다.


문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매우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응답층은 93.8%가 추미애 장관도 "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중 86.4%는 윤석열 총장은 "잘못하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반대로 문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매우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한 응답층은 87.6%가 윤 총장이 "잘하고 있다"고 추어올렸다. 그러면서 92.7%는 역으로 추 장관이 직무를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광주·전남북에서는 응답자의 60.9%가 추 장관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윤 총장에 대해서는 64.4%가 "잘못하고 있다"고 폄하했다. 반면 대구·경북에서는 응답자의 59.0%가 추 장관이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윤 총장은 58.3%가 "잘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지난해 10월 3일 범보수 광화문 집회(자료사진).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지난해 10월 3일 범보수 광화문 집회(자료사진).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대공무사의 관점에서 이들이 적임자인지 아닌지, 일을 잘하고 있는지 어떤지 들여다본 응답이었을까. 대구·경북과 광주·전남북이 태평양의 이쪽과 저쪽도 아닐진데, 여기서 적임자가 저기서 부적합자로 돌변하고, 저기서 잘한 사람이 여기서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결국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느냐 여부에 따라 추 장관과 윤 총장에 대한 평가도 '묻지마' 식으로 연동됐다. 이 사람이 '살아있는 권력'의 편인 것 같으면 '묻지마 지지'가 따라오고 '무조건 반대'도 뒤따른다. 반대로 '살아있는 권력'을 거스르는가 싶으면 어제까지 "우리 윤 총장"이던 사람이 "석열이 개XX"가 되고, 적폐청산 강압수사를 한다며 경원시하던 사람들로부터 역으로 찬사를 받기 시작한다.


정파와 권역별로 '내 아들'이 하루 아침에 '부모 죽인 원수'가 되고, 그 반대의 일이 횡행한다. 원수든 아들이든 적임이면 천거하는 기해의 대공무사의 정신은 그야말로 춘추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 됐다.


아무리 문 대통령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세상 모든 일이 남김없이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의 편에 서 있으면 추미애 장관, 조국 전 장관부터 감싸안는 범위가 끝없이 확장돼 마침내 정경심 교수까지 '검찰개혁을 위해 한몸 던지신 애국자며 영웅, 성녀(聖女)'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당당하게 "나는 오직 사람에게 충성한다"며 정파만이 자신의 판단기준임을 내세우던 사람이 '조국 사태'의 백서까지 편찬한다니 후안무치가 그 끝을 알 수 없게 됐다.


문 대통령에 대한 극렬 반대층도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도 지지하지 않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은 것처럼 문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들 중에는 문 대통령에 대한 반대가 지나쳐 직전 대통령의 모든 것을 미화하고 숭모하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까지 있다. 문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한다 한들 잘 찾아보면 잘한 일이 하나둘이야 없겠느냐만은 모든 것을 무조건 '비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여론조사를 매주 거듭할수록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되기만 할 뿐, 개선되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게 과연 나라인가. 누가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우리 국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대통령 당선이 확정적이었던 2017년 5월 9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내일부터 나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나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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