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캐즘' 앞에서 헷갈리는 車 시장
"생각보다 안 팔려"… 전환 목표 조절
"미래 경쟁력 확보"… 출시 시기 그대로 유지
미래의 자동차로 손꼽히며 과열됐던 전기차 시장이 캐즘(일시적 정체기) 장기화로 갈피를 못잡는 모양새다. 캐즘 초기에는 전기차 전환 목표를 늦추고 관망하는 모습이 포착됐으나, 장기화 양상이 두드러지자 최근엔 전기차 전환 속도를 유지하는 업체들도 등장하고 있어서다.
캐즘의 끝을 알 수 없는 전기차 시장에서 꾸준히 신차를 출시하며 존재감을 굳히고, 향후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읽힌다. 과거 자동차 시장을 선두해왔던 레거시 자동차 브랜드들의 위상을 뛰어넘을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 역시 주효했을 것으로 보인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스텔란티스는 중국 CATL과 스페인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50대 50의 합작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공장에 투입되는 비용은 약 6조원 규모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가 생산될 예정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 닛산 역시 미국에서 지난 10일부터 테슬라 슈퍼차저인 NACS 충전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내년엔 미국 시장에 전기차 신차인 N7을 출시할 예정이다.
닛산은 전세계 전기차 전환 태동기에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을 뒤로하고 전기차에 올인한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8월에는 일본의 전기차 후발업체인 혼다와 전기차 파트너십을 발표하고,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개발을 협력하기로 했다.
현대차·기아 역시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드는 업체 중 하나다. 올해 전기차 판매가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는 한국과 유럽에서 EV3를, 미국 시장에서 EV9를 출시했다. 현대차 역시 캐스퍼 일렉트릭을 출시했고, 내년 초 아이오닉9의 한국 및 미국 시장 출시를 앞두고 있다.
또 현대차는 중국 베이징자동차(BAIC)와의 합작사인 베이징현대에 각각 5억4800만 달러(약 7800억 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그간 중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전기차가 없었던 만큼, 이번 투자를 통해 중국에서 전기차를 현지생산해 현지 업체들과 경쟁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인 만큼 투자 계획을 출시한 업체들과 크게 상반된다. 볼보는 2030년까지 순수 전기차 브랜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던 계획을 철회했고, 경량 스포츠카 업체 로터스의 순수 전기차 계획도 폐기됐다.
포르쉐 역시 2030년까지 전체 생산량의 80%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했고, 토요타와 혼다 등 닛산을 제외한 일본 주요 업체들은 전기차 시장에선 존재감이 없는 상태다.
전기차를 바라보는 업체들의 시선이 극명하게 갈린 것은 저가 중국 전기차의 공습으로 인한 시장 확대의 어려움으로 풀이된다. 기존 충전 인프라, 높은 가격, 주행거리 불안 등의 우려 요소도 아직 산재하지만, 최근엔 중국 전기차가 몸집을 급격히 불리면서 글로벌 업체들의 압박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1~10월) 전세계 전기차 등록 대수는 전년 동기 대비 23.7% 증가한 1355만6000대를 기록했다. 수치만 보면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 같지만, 성장을 견인한 것은 모두 중국 업체다. 좀처럼 커지지 않는 시장 규모에 관망하는 동안 중국 업체들의 시장 장악이가팔라진 셈이다.
1위에 오른 중국 BYD는 310만7000대를 팔아 전년 동기 대비 36.5% 성장률을 기록했고, 중국 지리그룹 역시 내수와 유럽에서 고성장세를 보이면서 총 105만4000대를 판매했다. 반면 기존 판매량이 확대돼왔던 테슬라, 현대차·기아 등은 역성장했다. 테슬라는 전년 동기(144만대) 대비 1.1% 감소한 142만5000대를 판매했고, 현대차그룹은 45만5000대를 판매하며 전년 동기 대비 3.4% 역성장했다.
당장의 수익성을 지키느냐, 미래에 투자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놓고 자동차 업체들의 양극화가 앞으로 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기차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미국에서 내년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으로 시장 둔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당초 중국 업체들은 높은 관세로 미국에서 전기차 판매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만큼, 글로벌 브랜드들이 미국에 대응하는 사이 미국 외 국가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장악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우려도 나온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전기차를 많이 팔기 어려운 건 중국 업체를 제외하고 모든 브랜드가 비슷한 상황일 것이고, 특히 앞으로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집권하는 4년간 전기차 판매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며 "전기차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연기관 수준으로 가격을 낮춰 중국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향후 미국 뿐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중국에게 잠식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