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지만, 티빙에서 방영된 드라마 ‘우씨 왕후’는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왕위 계승을 다루고 있다. 모든 권력이 투표로 결정되는 현대와는 다르게 혈통이 중요한 계승 요건인 과거에는 종종 몇 사람의 의지나 꼼수로 결과가 달라지기도 했다. 서기 197년 5월, 고구려의 아홉 번째 임금인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18년간 재위했던 그에게는 우씨 성을 가진 왕후가 있었다. 우씨 왕후는 그날 밤, 왕이 승하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궁 밖으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왕의 동생인 발기였다. 우씨왕후는 그에게 후사 문제를 논의했지만, 발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사실, 왕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비가 찾아와 후사 문제를 언급한 것은 대단히 이상한 것은 물론, 자칫하면 역모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거기다 우씨 왕후와 같은 집안인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몇 년 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일이 있었다. 당연히 우씨 왕후의 입지는 취약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후사도 없었다. 따라서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왕의 첫 번째 동생인 발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몸을 사리는 것이 당연한 발기로서는 우씨 왕후의 발언 하나 하나가 위험하고 모순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씨 왕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난다. 우씨 왕후는 포기하지 않고 왕의 두번째 동생인 연우의 집으로 향한다.
연우는 형인 발기와는 달리 우씨 왕후를 정성껏 모셨다. 그런 모습에 안심한 우씨 왕후는 왕의 죽음을 알리면서 다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한다. 예상 밖의 소식에 충격을 받았는지 연우는 고기를 직접 썰다가 손을 다치기까지 한다. 결국 우씨 왕후는 연우와 함께 궁궐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왕의 죽음과 함께 연우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발표한다. 우씨 왕후는 죽어서 선왕이 남편에 이어 동생이자 고구려의 열 번째 임금이 된 산상왕의 부인이 된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부인으로 삼는 형사취수제에 의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누가봐도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유언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컸고, 가장 크게 반발한 건 정당한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발기였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병력을 모아서 궁궐을 포위한 채 동생인 연우를 협박한다.
“당장 궁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너의 처자식을 죽이고 말겠다.”
하지만 연우는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정확하게는 우씨 왕후가 버텼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하룻밤 사이에 왕위를 잃게 된 발기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우씨 왕후와 동생인 연우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자신을 살려둘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지지하는 세력들이 줄어들자 발기는 결국 고구려를 떠나 요동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고구려와 갈등을 빗던 공손씨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발기는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군사를 빌려주면 우씨 왕후와 연우를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공손탁은 발기의 억울함은 관심이 없었겠지만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은 놓치지 않고 3만의 군대를 빌려주었다.
발기가 이끄는 요동군 3만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발기와 연우의 막내 동생인 계수였다. 뛰어난 장군인 그는 형인 발기가 이끄는 요동군을 격파한다. 패배한 발기는 도망치는 자신을 추격하는 계수에게 늙은 형을 죽일 셈이냐고 호소한다. 하지만 계수는 냉정하면서도 가슴 아픈 대답을 한다.
그 말을 들은 발기는 죄책감과 억울함,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에, 배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반역자로 죽은 형의 시신을 정중하게 장레를 치러준 계수는 궁으로 돌아와서 왕이 된 또 다른 형 연우의 질책을 듣는다. 그러자 계수는 형이 비록 유언이라고 해도 왕위를 덥석 받은 것은 형제간의 우의를 해치는 일이었는데 죽은 발기의 장례를 치러줌으로서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우의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한 마디로 너는 마음에 안들지만 나라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산상왕은 그 얘기를 듣고 깊게 뉘우쳤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승리한 계수까지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좋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발기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발기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아서 궁궐을 장악했다면 우씨 왕후와 연우가 반란자로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역사는 발기의 난이 아니라 연우의 난이나 우씨 왕후의 난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권력에 눈이 먼 연우와 남편을 잃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못난 왕후의 반란으로 말이다.
정명섭 작가